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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23. 2023

25화 - 지나간 건 중간고사고, 시작되는 건 수련회다

 나는 라영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었다. 하지만 라영이는 내가 지금까지 보던 얼굴 중 가장 안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라는 말이 내 입속에서는 수십 번이나 맴돌았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누가 봐도 안 괜찮은 표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라영이가 이 사람 많은 교실에서 진심을 이야기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특히 현선이의 무리들은 학교 여기저기에 포진해 있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라영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영이는 미래가 아니다. 라영이는 아직 미래만큼 편하지 않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라영이 뒤를 몰래 따라가기로 했다. 집에 잘 도착하는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라영이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라영이 뒤에 있는 건물에 숨어 있었다.


 “너 뭐 하니?”

 내 뒤통수를 스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미래야... 넌 왜 여기...”

 “라영이 집까지 따라가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걱정이...”

 “라영이 오늘 집에 안 가고 엄마 꽃집 간대. 믿을만한 정보니까 그만해.”


 미래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이미 라영이는 길을 건너버렸다. 라영이 어머니의 꽃집 위치를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미행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미래와 왔던 길을 같이 되돌아갔다.     


 “근데 유준아. 너 포지션을 잘 잡아야 한다.”

 “포지션?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라영이랑 현선 중에 누가 잘못한 것 같아 보이니?”

 “글쎄... 내가 아직 상황을 정확히 잘 몰라서...”


 현선이의 커닝 때문에 라영이가 화가 났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미래에게 하지 않았다. 100%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근데 네 행동은 라영이 편이잖아.”

 “그건 내 짝꿍이기도 하니까...”

 “그런 얄팍한 핑계 대지 말고. 네가 라영이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그냥 라영이 편드는 거잖아.”


 늘 느끼는 거지만 미래는 예리하다.


 “근데 유준아.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누가 잘못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

 “응?”

 “내가 보기에 오늘 싸움으로 우리 반은 꽤 큰 분열이 생겼어. 현선파 대 반현선파. 물론 이건 여자들 대상으로 한정했을 때. 사실 이 구도는 원래부터 어느 정도 있었던 거지. 현선이를 따르는 애들은 원래 좀 있었으니까. 현선이가 반에서 무리 지어 다니는 거 알지?”     


 미래는 마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처럼 체계적이고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건 잘 몰랐다. 공부하고 축구하고 노느라 그런 것까지 볼 시간이 없었다. 아까 현선이를 둘러싸준 그 무리들이 현선파라는 이야기구나.     

 

 “넌 사실 현선이랑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잖아. 라영이는 이번에 같은 반 되면서 처음 알게 된 거고. 근데 너는 라영이 편만 드는 것처럼 보여. 문제는 너는 반장이란 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네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에 따라 너는 진정한 리더십을 갖춘 반장이 될 수도 있고, 지지 기반의 절반을 잃게 되는 반쪽자리 반장이 될 수도 있어.”     


 미래는 정치 참모가 되면 엄청난 인물이 될 것 같다. 킹메이커로 딱이다.   

  

 “미래야! 저녁 같이 먹을래?”

 “아니 안 돼. 오늘 가족 행사가 있어서 가봐야 돼. 내일 봐.”     


 미래는 가버렸다. 오늘만큼은 미래도, 라영이도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  


 ***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동안 학교가 소란스러웠다. 우리 반을 포함해서 1등이 바뀐 반이 많았다. 전교 1등은 정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자애가 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지난 1년 동안의 적응 기간을 완전히 끝내고 본격적인 순위 경쟁이 시작된 느낌이다. 기초는 탄탄하지만 그동안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노력하면서 성적이 확 올라갔다. 그리고 운과 깡으로 상위권을 유지하던 친구들 중 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친구들은 성적이 확 내려갔다. 그리고 나처럼 공부를 안 하는 친구들은 당연히 성적이 떨어졌고.

     

 고등학생이 되니 이제 정말 시험 하나하나마다 절실함이 느껴졌다. 이 성적이 대학교와 직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부담감이 상당해졌다. 중학교 때는 항상 마음 편히 시험을 봤었는데... 고등학생이 된 이후 긴장감과 부담감이 나를 꽤 짓누르고 있었다.


 이건 내 자존감과도 당연히 연결된다. 수석이라고 나를 우러러 봐주던 시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잘생긴 얼굴 덕에 여전히 나를 봐주는 시선은 많다. 하지만 그전처럼 존경의 시선은 없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하는 것과 그냥 얼굴만 잘생긴 건 차원이 다른 것 같다. 김태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가 된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공부할 의지를 조금은 찾았다는 점이다. 미래는 내 훌륭한 라이벌이자 내게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는 소중한 친구다. 기말고사 때는 미래를 이기고 일단 반 1등을 되찾아오는 것이 목표다. 물론 효석이도 경쟁 상대지만 그래도 왠지 효석이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유례없는 순위 변동으로 한동안 학교가 소란스러웠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등수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도 하고 많은 친구들은 성적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조만간 가는 수련회 때문이기도 했다. 2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다.     

 

 재정상의 문제로 2박 3일로 계획되었던 수련회가 1박 2일로 바뀐 건 매우 슬픈 일이었다. 어차피 참가비를 N등분해서 우리가 낼 텐데 학교에서 말하는 재정상의 문제라는 건 대체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학교에서 정해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수,목,금 이렇게 3일을 놀아야 할걸 목,금 이렇게 이틀 밖에 놀지 못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살짝 한심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공부라는 건 수련회 다녀와서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나 보다. 결국 수요일 수업은 모두 시끌벅적하게 끝이 났다.    

 

 수련회 전날 밤을 평범하게 보내는 건 너무 아쉽다. 물론 효석이 같은 애는 똑같이 공부하면서 보내겠지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점심시간에 이미 영만이, 정혁이와 계획은 다 짜뒀다. PC방에 가서 저녁 내기 배틀을 하고 이후에는 노래방을 가기로 했다. 수련회 때 장기자랑 시간은 당연히 있을 테고 우리의 노래를 들려줘야 하니 미리 연습하자는 우리 남자들의 영특한 계획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할 야간 농구까지.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농구장의 위치는 이미 확인해 뒀다.


 우리의 계획은 완벽했고 실제로도 정말 재밌었다. 물론 밤 12시에 집에 들어와서 또 화난 엄마를 잠깐 마주쳐야 했지만 내일 수련회 짐 싸야 한다는 핑계로 내 방으로 얼른 들어가 버렸다. 내일은 수련회니까 모레까지는 일단 엄마를 피할 수 있다.     


 ***


 드디어 수련회다! 교복을 벗어던진 친구들의 모습은 훌륭했으면 했지만... 충격적인 패션도 많았다. 특히 효석이는... 효석이 아버지가 오신 줄 알았다. 아버지 옷을 그대로 입고 온 모양이다. 효석이 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아마 저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라는 역시 꾸밀 줄 아는 애 다웠다. 나라는 짝 달라붙는 빨간색 바지에 노란색 라운드 티를 입었다. 패션만 놓고 보면 분명 그 누구도 쉽게 소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라 특유의 분위기로 패션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라는 분명 오늘 장기자랑 시간에 뭔가 큰 거 한 방을 준비했을 것이다.     


 미래는 검은색 반바지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치고 왔다. 바지가 짧아서 인지 유달리 긴 다리가 빛나 보였다. 라영이는 청바지에 얇은 청자켓을 입고 왔다. 난 원래 최악의 패션 중 하나로 늘 청-청 패션을 말해왔다. 하지만 라영이는 보란 듯이 청-청 패션을 소화해 냈다. 여신의 색깔이 원래 청색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원래도 예뻤지만 교복이 아닌 사복은 라영이를 연예인에 가깝게 만들어줬다. 거기에 매일 묶고 다니던 머리까지 풀었다. 오늘 라영이 짝꿍은 정말 좋겠다... 물론 교실에서 라영이 짝꿍은 나지만 오늘은 수련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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