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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Aug 16. 2023

24화 -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다

 “야! 김라영! 너 잠깐 나 좀 보자!”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쉬는 시간. 그 평화를 깬 건 현선이었다. 종이 울리고 쌤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현선이는 우리 자리로 왔다. 그리고는 라영이를 불러냈다.


 내가 “무슨 일인데?”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라영이는 내 옆에 없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라영이가 바로 따라간 걸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다.     


 대체 어디로 불러내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 따라가지 않으면 그건 짝꿍의 도리가 아니다. 하물며 라영이 일인데 안 갈 수가 없다. 2반과의 축구 시합 역전골을 넣었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라영이의 뒤를 따라갔다.     


 둘이 만난 장소는 등나무 아래였다. 이곳은 등나무가 사방으로 감싸고 있어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고백하거나 이벤트 할 때 우리들이 자주 애용하는 장소기도 하다.


 현선이는 온몸으로 못마땅함을 표현이라도 한다는 듯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는 라영이 역시 기죽어서 따라가는 모양새는 아닌 것 같았다. 강렬한 태양빛을 등나무가 온몸으로 막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줬지만, 현선이와 라영이는 그 그늘을 다시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둘 다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장소는 등나무 아래지만 굳이 둘만이 이야기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나를 포함한 구경꾼들이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했다. 현선이는 원래 본인의 무리를 만들어서 다니는 유형이었다. 현선이가 미리 지시를 했는지 현선이 주변에는 현선이의 무리들이 꽤 보였다.     


 “야! 아까 거기서 꼭 그런 식으로 해야 했냐?”

 “내가 뭘? 난 정직하게 플레이했어.”

 “정직? 웃기시네. 너 일부러 그랬잖아!”

 “일부러라니. 그런 상황에서 난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최선을 다하는 게 같은 편을 밀치는 거냐?”

 “네가 위치 선정을 잘못 한 거지. 나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내 옆에 왜 딱 붙어있었던 건데.”     

 대화가 또렷하게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 이런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둘의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일 때문에 저러는 건지...     


 “아까도 그러더니 결국 한 판 하는구먼.”

 내 옆에 있는 좁은 틈사이로 끼어든 여자애가 말했다. 규아다.


 “규아야.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너 몰라? 아, 너 오늘 체육 시간에 없었지. 쟤들 아까 피구 시합 때문에 저래.”   

  

 오늘 체육시간에 학교 발전회의가 있어서 반장으로서 그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체육시간을 빠져야 해서 아쉬워했는데... 하필 이런 큰일이 발생했을 줄이야.     


 “현선이랑 라영이랑 같은 편이었거든. 그런데 공 피하다가 둘이 부딪히면서 현선이가 아웃됐어. 그것 때문에 저러는 것 같은데?”

 “아니, 지금 고작 피구 때문에 이러는 거야? 피구가 뭐라고. 다른 반하고 시합한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반만 한 거잖아.”

 “근데 원래 쟤네 둘이 사이 안 좋았잖아. 언제 한 번 걸려라 하고 있었는데 오늘 피구 할 때 부딪히고 드디어 팡하고 터진 거지!”     


 내가 더 묻지도 않았는데 규아는 꽤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은 늘 무리 짓기다. 학기 초반 며칠 동안 친해진 친구와 함께 1년 동안 쭉 가는 것이 보통이다. 무리가 지어지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쉬운 건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는 거다. 새 학년이 시작하고 처음에는 라영이 뒤에 나라가 앉았고 그 뒤에 현선이가 앉았었다. 사교성으로는 전교 원탑인 나라가 앞뒤로 금방 친해졌을 것이고. 그렇게 라영, 현선, 나라, 이렇게 3명이서 한동안 같이 다녔다.      


 그리고 지금 라영이랑 다시 짝꿍을 할 때까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3명이 같이 다니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다. 나라는 원래 거의 모든 친구들과 같이 다니는 애니까 뭐 그렇다 쳐도, 라영이와 현선이가 같이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애들이 많이 몰려들면서 현선이와 라영이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현선이의 험악한 표정만큼은 잘 보인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라영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몸에서 지지 않으려는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라영이가 불리하다. 현선이의 무리들이 원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정도 잘 모르면서 라영이를 까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 귀에도 들린다. 이런 식은 곤란하다. 싸우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싸워야지. 이건 스포츠 정신에 위배된다. 문제는 우리 편 라영이가 피해를 보는 쪽이라는 거다. 이 위기를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옆에 정혁이가 있었다. 분위기가 싸해서 내가 억지로 정혁이를 끌고 왔다. 정혁이는 원래 남 일에는 전혀 관심 없지만, 내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혁아! 안 되겠다. 나 좀 도와줘. 동시에 소리 한 번 지르자. 그래야 끝나겠다. 자! 하나 둘 셋! 우아아아아!”     


 정혁이와 내가 동시에 지른 괴성은 형체 없는 대포와 같았다. 시장을 방불케 하는 데시벨을 자랑했던 등나무 일대는 일순간 조용해졌다. 특히 소리를 낸 사람이 정혁이라는 걸 알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 시끄러웠던 현선이 무리들도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깐만! 현선아! 라영아! 둘이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친구 둘이 이렇게 대놓고 싸우는 건 내가 볼 수가 없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반장인데 좀 그렇잖아? 현선이 짝꿍 선형이! 넌 현선이 데려가고. 라영이는 내 짝꿍이니까 내가 데려갈게. 잠시 휴전하자. 학교 한복판에서 이러는 건 좀 그렇다.”

 “아씨. 한창 재밌었는데 정의의 사도 납셨네!”   

  

 병달이의 비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조용히 안 하냐!”

 그리고 정혁이의 한 마디에 병달이는 바로 조용해졌다.    

 

 나는 일단 라영이를 현선이로부터 떨어뜨렸다. 현선이의 무리가 계단을 꽤 올라간 걸 보고 난 후에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현선이를 데리고 가라고 했더니 선형이는 현선이 무리 뒤를 겨우 따라가고 있다.     


 일단 라영이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나도 라영이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적잖이 당황했지만 라영이 앞에서 그걸 티 낼 수는 없다.


 “라영아! 괜찮아?”

 당황한 내 표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라영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근데 이것 좀 놔줄래? 너무 세게 잡아서 아프다.”

 라영이랑 손가락 한 번 스쳐본 적이 없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가 라영이 팔을 세게 잡고 있었나 보다.          



 라영이가 현선이와 격하게 싸운 이유가 있었다. 중간고사 결과 현선이가 우리 반 4등, 라영이가 우리 반 5등이었다. 중간고사 때 현선이는 라영이 앞자리에 앉아서 시험을 봤고, 현선이 앞에는 미래, 그 옆자리에는 효석이가 앉았다.     


 시험에 집중하던 라영이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 현장을 봐버렸다. 현선이가 커닝하는 모습을 말이다. 현선이 앞자리에 앉은 미래는 중간고사 1등, 효석이는 2등. 현선이는 커닝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고개와 눈을 굴렸나 보다.      


 사실 우리 모두 의아하긴 했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머리가 특출 나게 좋아 보이지 않은 현선이가 반 중간 정도 성적에서 갑자기 4등으로 치고 올라온 것이 이상하긴 했다. 라영이는 현선이가 커닝해서라고 확신했지만, 정황 증거만 있을 뿐 물증이 없으니 시험 볼 때 선생님께 이야기를 못했고, 시험이 끝난 뒤에는 더 말하기 어려워졌다.     


 부정행위로 자신보다 성적이 더 잘 나온 현선이가 당연히 싫었을 텐데, 마침 피구 시합으로 한 번 부딪히니 라영이도 쌓였던 것이 폭발했던 것이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교실 분위기는 냉랭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현선이는 매번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신발을 큰 소리로 끌면서. 반면 라영이는 학교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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