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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Oct 12. 2023

37화 - 536,112,000초 중에 44초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어? 나 지금 엄청 배고파서 내가 이기면 진짜 많이 사달라고 할 수도 있어.”

 “푸훕. 그래 한 번 해보자.”

 “준비해. 하나, 둘, 셋 하면 시작하는 거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예정에도 없던 눈맞춤 기회가 왔다. 조건은 완벽하다. 우리 둘만이 있는 공간이고 습기 가득한 꽃집 속에 들어와 있는 내 눈은 최근 들어 가장 컨디션이 좋다.


 라영이의 폰 뒷자리는 44다. 물론 44초라는 시간은 내게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하나, 둘... 잠깐만! 다시 다시!”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였을까. 스타트가 좋지 않은 것 같아 화들짝 출발 신호를 원위치시켰다.  눈에 눈곱이 낀 것 같은 기분이다. 남들이 보기엔 꼴랑 44초 하는데 호들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44초는 내 눈맞춤 역사상 가장 긴 도전인 만큼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손을 비벼 따뜻하게 만들어 눈을 만져준다.


 “미안. 이번에는 진짜 시작한다!”

 당황환 내 눈과 달리 라영이의 눈은 매우 편안하다. 심지어 내가 이 호들갑을 떠는 동안에도 눈을 깜빡이지 않은 것 같다.      


 “하나, 둘, 셋! 시작!”     


 기습적으로 시작했다. 사실 이 눈싸움은 내가 이겨도 좋고, 44초만 넘길 수 있다면 내가 져도 좋다. 내가 이기면 라영이가 사주는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고, 44초를 넘긴다면 나는 라영이와 눈맞춤 세계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내가 살아온 날을 초로 환산하면 몇 초일까.


 하루가 24시간이니 하루를 초로 계산하면 60초×60분×24시간=86,400초다. 1년이 365일이니 86,400초×365일=31,536,000초다.


 내가 17년을 살아왔다고 하면 31,536,000초×17년=536,112,000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약 5억 3천만 초 중에서 겨우 44초만 참으면 된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왜 이런 걸 하고 있냐고? 난 암산 천재니까. 그리고 이걸 함으로써 22초 정도 보낸 것 같다. 라영이 눈을 빤히 바라보고 했다면 실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암산을 하며 잠깐 다른 곳에 정신을 둔 덕에 목표 시간의 절반가량을 보냈다.     


 사람이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있을 때 절대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에 착안한 내 필살기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22초를 더 버텨야 한다. 눈싸움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눈을 깜빡이는 것에만 신경이 쓰인다. 이럴 때일수록 딴생각을 해서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한다.     


 난 두 번째 생각의 주제를 눈맞춤 시작 전에 이미 정해뒀다. 라영이가 받았다던 장미꽃들이다. 대체 누가 줬을까... 일단 우리 반은 영만이처럼 연애감각 0인 놈만 준 것 같다. 내가 라영이 옆에 딱 있는데 감히 라영이에게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만이는 어차피 그동안 짝꿍이었던 여자애들한테 다 준 거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 외에는 1반 권민재, 1학년 홍지웅... 30송이 중에 겨우 3명 알고 있다.     


 라영이와 한 달 넘게 짝꿍 하면서 라영이를 전보다 조금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조차도 라영이를 처음 알게 된 건 나와 다른 반이었던 시절 아니던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내 눈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건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수련회 때 내 영혼을 멈추게 했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다시 듣고 싶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보름달에게 서울대가 아닌 라영이와 같은 반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었다. 그리고 그 기쁜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라영이와 내가 2학년 4반이 되었고.     


 그런 라영이인데 같은 반이 되고 짝꿍이 되면서 많이 편해졌던 것 같다. 여전히 예쁘지만 날마다 옆에서 보니까 신비감은 조금 떨어진 느낌이랄까. 만약 내가 라영이와 다른 반이었고 라영이를 가끔씩 밖에 못 봤다면 나도 오늘 라영이에게 아침부터 꽃을 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너 생각보다 오래 버틴다?”

 한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영이가 말을 걸어왔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한다고 했잖아.”     

 생각에서 현실로 돌아온 나는 급격히 눈이 빡빡해져 옴을 느꼈다. 몇 초나 지났을까... 44초를 넘겼을까... 5억 3천만 초중에 겨우 44초야...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봤다.


 시곗바늘은 멈춰 있었다. 성공했다. 라영이와 눈맞춤에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니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이겼네!”

 라영이는 환하게 웃으며 시계를 바라봤다.     


 “근데 시계 약이 다 됐나 보네. 바늘이 멈췄네. 지금이 정확히 몇 분이지.”     

 라영이는 벽에 걸려 있던 멈춰버린 시계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뜬 채 폰으로 시선을 옮겨 갔다.


 지금 라영이가 폰을 보게 되면 세상이 이상해졌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난 서둘러 화제를 바꿔야 했다.     


 “라영아! 근데 네가 가져온 저 꽃들이 대체 몇 송이야?”

 내 갑작스러운 말에 라영이는 폰을 보려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아... 저거. 글쎄. 내가 따로 세어보지는 않아서.”

 “누가 줬는지는 다 기억하고 있어?”

 “아니. 처음 보는 남자들도 있고 해서.”     


 대체 처음 보는 남자들은 왜 라영이에게 꽃을 주는 거야...     


 “꽃집에 원래 이 집 꽃이 아닌 다른 꽃들이 있으니까 이상하긴 하다. 그치?”

 “맞아. 근데 울 엄마는 다른 곳에서 온 저 꽃들도 애지중지 예뻐해 주실 거야 아마.”     


 그렇지. 라영이 어머니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으실 분이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몇 분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기 라영아. 수련회 때 있잖아... 그때 너는 멀쩡했어?”

 서두르려다가 앞뒤 다 잘라먹고 섣부른 질문을 해버렸다.  

    

 “멀쩡? 갑자기 왜? 나 아무 문제없었는데. 넌 어디 아팠어?”

 다행히 라영이는 정상적으로 답을 해줬다.     


 “나는 박카스만 마셔도 취하는 체질이라... 넌 맨 정신이었나 싶어서.”

 “응. 난 아주 멀쩡했어. 넌 그 술 때문에 그런 건가? 난 조금 마셔서 그런지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지던데.”

 “그렇구나.”     


 결국 라영이는 내가 한 말을 아주 잘 들었다는 뜻이 된다.

    

 “그럼 그때 네가 했던 말 진심이었어? 내가 제일 괜찮다는 말.”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라영이는 살짝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금방 대답해 줬다.     


 “여자들이 짝꿍 정할 때 내가 네 옆에 앉았었잖아.”

 라영이는 조금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내 얼굴도 붉어지려 하던 찰나,  라영이는 조금 민망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근데 아빠한테서 전화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네.”


 라영이는 또다시 폰에 손이 갔다. 그래서 나는 또 급하게 물어봤다.     


 “전화? 지금?”

 “사실 아빠가 지금 해외에 계시거든. 시차 때문에 보통 이 시간에 전화를 많이 하셔.”

 “그렇구나. 해외에는 일 때문에?”

 “응. 그렇지.”     


 라영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특히 수련회 때 내 이야기에 대한 답을 제대로 듣고 싶었는데... 다른 이야기로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이러다 곧 눈맞춤 시간이 끝날 것만 같다.     


 “유준아! 너희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되나?”

 라영이는 순진한 얼굴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간인데... 그렇다고 라영이의 질문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버지는 그냥 회사 다니시고, 어머니는 집에 계셔.”

 “형제는?”

 “여동생 한 명 있어. 나이차이가 좀 많이 나는. 아직 초등학생이거든. 넌 형제 있어?”

 “아니. 난 외동이야.”

 “정말? 그렇게 안 보였는데. 혼자면 외롭거나 심심하지는 않아?”

 “괜찮아. 엄마랑 자매처럼 지낼 때도 많거든. 꽃집 일만 도와드려도 하루가 금방 짧아. 공부도 해야 하는데 말이야.”


 아까 느꼈지만 라영이는 엄마랑 정말 사이가 좋은 것 같다. 나와 많이 비교된다.           


 “유준아! 우리 이제 나가서 저녁 먹을래? 나 이제 배고프다.”

 주스로 급한 불은 껐지만 내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난지 오래다. 문득 내가 눈맞춤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시계를 봤다. 어느샌가 시계는 멀쩡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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