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뒤로 유진은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갔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유진을 돌보는 데 온 마음을 쏟았다. 아침이면 따뜻한 밥을 준비하고, 유진이 입고 나갈 옷을 골라주며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저녁에는 동화를 읽어주며 유진을 재우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유진에게 물었다.
“유진아, 유치원은 어때? 친구들이랑 잘 지내?”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기억은 유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날마다 되살아났다.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손을 꼭 잡고 집 앞 공원을 산책하던 장면, 아침마다 어머니가 건넸던 따뜻한 미소. 그런 기억들은 유진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큰 외로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밤이 되면 유진은 어머니를 더 그리워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떠보면 어머니 대신 텅 빈 방과 낡은 천장만이 유진을 맞이했다.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유진을 키웠지만, 유진은 점 점 더 표정을 잃어 갔다. 어머니의 존재가 사라진 세상에서, 유진은 할머니의 사랑이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유진은 점점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상에 갇히기 시작했다. 복잡한 감정과 떠오르는 기억들을 할머니에게 말할 수 없었던 유진은 차츰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진은 다소 동떨어진 존재였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유진은 창밖을 바라보거나 하늘의 구름이나 나뭇잎을 관찰했다.
할머니는 유진의 이런 모습을 보며 속이 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유진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진아, 할머니가 네 곁에 있어. 네가 외롭지 않게 해 줄게.”
하지만 유진은 할머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진은 어머니가 떠난 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움, 혼란, 그리고 가끔은 알 수 없는 분노까지. 어머니가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돌아올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유진은 책상에 앉아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속 어머니는 따뜻하게 웃으며 유진을 안고 있었다.
“엄마…” 유진은 사진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떠난 이유가 자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아버지의 고성과 할머니의 한숨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어머니의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유진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유진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평소 같으면 부엌에서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우리 유진 배고프겠다. 얼른 손 씻고 밥 먹자!” 하고 웃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용했다.
“할머니?”
유진이 부엌문을 열자, 식탁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평소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음식을 준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할머니는 식탁에 턱을 괸 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할머니, 어디 아파요?”
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고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유진아.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
하지만 유진은 할머니가 아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떨리고, 평소 같지 않은 모습에 유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