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가족
김혜수를 찾아가는 과정은 유진과 도훈에게 쉽지 않았다. 남아 있는 정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작은 단서들을 하나씩 이어나가며 결국 김혜수가 충청도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겨울바람이 메마른 들판을 스쳐 지나며 낡은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었다. 휑한 시골길 옆으로 펼쳐진 논밭은 추위에 얼어붙어 회갈색으로 바래 있었고, 낮게 깔린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바람이 몰아치면 마른 갈대가 우수수 흔들리며 춤을 추었고, 길가의 돌담 위에는 얼어붙은 이끼가 희미하게 빛났다. 먼 발치엔 연기가 오르는 굴뚝이 보였다. 담 너머로는 작은 나무창문이 달린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나는 따뜻한 빛이 바깥의 차가움을 더욱 선명히 느끼게 했다.
"저 집인것 같아요."
낮은 돌담옆에 기울어진 채 붙어있는 파란색 대문을 가리키며 도훈이 말했다.
유진은 긴장한 듯 크게 한숨을 내 몰아쉬더니 도훈의 뒤를 따랐다.
둘은 마침내 김혜수를 찾아냈다. 그녀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도훈이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김혜수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김혜수 씨 맞으시죠?” 도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김혜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었고 날씨때문인지 빨개진 코를 손등으로 훔치며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 제 이름을 아시는 거죠?"
유진과 도훈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홍선숙 씨를 찾고 있습니다. 김혜수 씨가 그분과 관련이 있다고 들어서요."
김혜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끝에 힘이 들어간 듯 옷자락을 꽉 잡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이름… 오랜만에 듣네요. 당신들은 대체 어떤 사이죠?"
유진이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분은… 제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어요.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진의 말을 들은 김혜수의 얼굴에 놀라움과 혼란이 스쳤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머리를 저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 추운 날씨에 여기서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김혜수의 작은 거실에서, 유진과 도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혜수는 유진의 어머니 홍선숙의 언니였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했으며, 김혜수는 동생을 돌보며 아버지의 병수발까지 한 효녀였으나 동생은 가난을 탓하며 부모님을 원망하고 일탈을 일삼았다고 했다.
“그애는 많은 걸 감추며 살아왔어요.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바꿨죠. 홍선숙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개명한 이름이에요. 원래 이름은 김혜미였어요.”
유진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 외삼촌은요? 엄마는 외삼촌이 있다고 했어요. 저는 언니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김혜수는 쓰라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외삼촌이라고 했던 사람은 아마 선숙이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거예요. 우리 둘뿐이었으니까요.”
"아니에요. 어릴때 외삼촌이 저희집에서 와서 몇일 묵은적도 있고 아버지와도 친했어요."
김혜수는 잠시 침묵하며 유진을 응시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엔 남자형제가 없었어요. 혜미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거나, 다른 누군가를 어떤 목적에 의해 그렇게 만든것 같아."
"다른 누군가요?"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김혜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혜미가 그 사람을 '외삼촌'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알기로는, 네 엄마가 어릴 때 우리 집에 가끔 찾아오던 남자애가 있었은데 혜미일을 많이 도와주었어. 그 애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도 모르지."
김혜수는 유진이 동생의 딸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반말을 하고 있었고, 유진 역시 자연스럽게 이모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 걸까요? 엄마가 왜 그를 그렇게 부르도록 했는지도 알고 싶어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자신의 과거를 덮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맞는 이야기들을 만들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 건지... 네가 '외삼촌'으로 기억하는 그 사람도, 혜미가 필요했던 안전망의 일부..."
옆에 있던 도훈이 조용히 말을 끊었다.
"저 그럼 동생분을 만나뵐수 없을까요? 유진씨의 어머니요."
김혜수는 답을 하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진의 반응을 살피던 그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진실을 이야기 했다.
"혜미는..." 김혜수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춘기 때부터 문제가 많았어. 학교폭력 문제로 퇴학을 당했을 당했고, 그 후로는 점점 더 상황이 나빠졌어. 보험과 카드 영업을 하며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해 피해를 준 일도 여러 번 있었고, 상습적인 사기 행각으로 결국 6개월 실형을 받았어. 그 뒤로로 사기 전과가 여러번 있었던걸로 알고 있어."
유진은 김혜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자 심장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엄마가 그때 집을 나간 것도 그 때문이었나요?"
김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혜미는 사고를 치고 집을 나간 뒤로 우리와 연락을 끊었어. 그 이후로는 내가 그녀의 소식을 들을 방법도 없었지. 나중에야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어쩌다 들었지만, 아이가 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네. 네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뜻이야."
유진은 자신의 존재조차 모를 만큼 어머니가 가족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너를 두고 나갈때도 다시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했을 거야. 아마 자신이 가족에게 남긴 상처를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자신을 찾지 않길 바랐을 수도 있고... "
김혜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지새끼를 두고... 모진년."
도훈이 조심스럽게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유진이라고 했니? 지금은 모든 걸 한꺼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엄마는 널 떠났고, 넌 엄마없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는거야."
김혜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김혜수는 유진의 눈빛을 응시하며,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읽은듯 하다. 그동안 감추어졌던 진실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유진은 마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혼란과 상실, 그리고 미처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혜수는 그런 유진을 바라보며, 그 표정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도 한때 가족에게 상처받고, 고통 속에서 진실을 마주해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유진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