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입시 2> 학벌 배급제가 망쳐놓은 교육현장
평등에 경도된 입학사정관제는 학벌 배급제에 불과하다. <교육과 입시 1>의 주제였다. 사실 평등은 나쁜 것이 결코 아니다. 배급제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은 단 한 번도 인류사회에 자리했던 적이 없고, 배급제는 단 한 번도 성공했던 적이 없다. 평등이라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을 향한 혁명 아닌 혁명은 언제나 특정 집단만을 위한 정의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A보다 더 평등한 B가 있다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은 실재했던 것이다. 평등은 왜 항상 세상을 망쳐왔을까. ‘평등이란 구호를 레버리지 삼아 이익을 챙겼던 배덕자(背德者)들’과 ‘더 평등할 특혜를 누렸지만 침묵하기를 넘어 당당하기까지 했던 위선자(僞善者)들’이 그 주범이다. 지금부터 평등주의자들이 벌여온 '평등'이란 이름의 불평등이 벌이는 폭력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필자는 철저히 동의한다. 학교장 추천 제도 덕에 결과적으로 보다 평등한 입시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강남 8학군도 특목고도 아닌 학생들이 통제된 경쟁률 속에서 지방의 인재들이 명문대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 서울대 지역균형선발 전형(이하 지균)은 각 고교 내신 최고점자에게 두 명에게 지원티켓을 준다. 즉, 우리 아이들은 학교장 추천서(=지균 티켓)가 있어야만 해당 전형에 지원을 할 수 있다. 전국 고교에 각각 딱 2장씩만 티켓을 할당하기 때문에, 대원외고나 부산의 혜광고나 똑같이 2명만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대원외고 전교 3등은 지방의 혜광고 전교 2등보다 더 우수한 인재일지언정 해당 전형으로 서울대에 지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떠한가. 누가 봐도 결과적으로 평등해지는데 이바지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인가 참을 수 없이 거북하다. 필자는 결코 수능 점수 몇 점 더 높은 학생이 더욱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강남 8학군에 과학고를 비롯한 특목고에 지방의 티켓 보유자들보다 더욱 우수한 인재들이 압도적으로 많음은 독자 모두들 인정할 것이다. 수능이라는 객관적인 지표를 기어이 무시하고서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의문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평등해지기 위해 비(非)명문고라는 벼슬을 누리지 못한 학생들의 기회는 짓밟혀도 되는 것일까. 위의 거북함은 이 의문에서 기인했을 테다.
‘일을 해서 월급을 주기도 하지만, 월급을 받았기에 일을 하기도 한다.’는 <소득주도성장>마냥 ‘우수한 인재라서 대학에 가기도 하지만, 대학에 가서 우수한 인재가 되기도 한다.’는 그들의 기가 막힌 주장도 일견 일리가 있다. 일련의 평등입시 속에서 구제되는 극소수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99가 손해를 볼지언정, 1이 지방학교라는 특수성을 빌어 더욱 많은 기회를 챙기는 평등은 가짜 평등이다. 그따위 평등은 폭력이고 교란(攪亂)에 불과한 것이다. 학벌주의란 실력이 아닌 학교 간판으로 이익과 기회를 편취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칭한다. 그렇다. 어쩌면 이와 같은 교란은 신종 학벌주의의 등장일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서울대 지상주의보다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더욱 학벌주의스러운 학벌주의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에는 계급이 있다. 수시 전형에서 학교장 추천서를 받음직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귀족 대우를 받으며 계급우위를 누린다. 이유는 다들 아실 테다. 한국의 고등학교는 명문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한국의 고등학교는 명문대를 못 보내면 ‘똥통 학교’ 취급을 받기도 한다. 결국 이와 같은 풍토와 함께 학교의 교육과 행정은 이처럼 ‘명문대 보내기’에 집중된다. 즉, 학교 입장에서 50명의 지방대생보다는 1명의 서울대생이 더 중요한 것이다.
수능으로 대학 가던 시절에는 이러한 차별이 딱히 문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예비 서울대생도 예비 지방대생도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재로 공부를 했고 공평무사가 철저히 엄수되는 수학능력시험으로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신과 교내활동이 입시와 직결되는 현(現) 입학사정관제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교내 계급화는 막대한 문제가 된다. 교사의 취향이나 학교의 이익에 부합하는 학생들은 특별관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역겨운 것은 그 수혜자들은 관리를 ‘특별’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우수성에 부합하는 합당한 대우라 여긴다는 것이다.
아니, 대학 가는 건 평등해야 하는데, 교육 받는 건 평등하지 말자는 것인가? 우수한 특목고생의 기회는 평등을 위해 빼앗아도 될 가벼운 것이지만, 본인의 우수함은 결코 평등과 타협할 수 없는 존엄한 것이란 말인가. 무엇인가 특별히 더 평등한 존재가 교육현장에 기생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금부터 한국의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다지도 악독한 '더 평등함'에 대해서 알아보자.
학교의 시스템은 온통 소수의 예비 명문대생들에 집중된다. 논문 발표대회나 실험 경진대회를 비롯한 학교의 기획들은 그들만의 잔치다. 말이 21C형 팀플이지,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 교과 내용조차 제대로 모르는 하위권 학생들과 아직 이해가 영글지 않은 중위권 학생들은 프로젝트에 관하여 천지분간이 되지 않음에도 무려 논문을 써야하고 실험실에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통 학생들은 그래야만이 생활기록부 특별활동란에 문장 한 줄 올릴 것을 교사로부터 윤허 받을 수 있다. 입학사정관제가 주도하는 입시에서 예비 명문대생들만을 위한 학교의 시스템에 갇힌 우리 보통 학생들은 그 귀족들을 위한 의전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식 착취형 학습의 화룡점정은 '명목상으로는 자율참가'라는 것에 있다. 기획실패에 대한 교사들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일수꾼들이 채무자에게 '너희가 도장 찍어놓고 왜 딴소리야'를 외치듯 말이다.
학교의 기획 아래 도태된 그들에게는 별실에서의 특별활동보다는 교실에서의 책 한 글자 더 보는 공부가 분명 더 효율적일 것이 확실하다. 필자의 이와 같은 발언에 중하위권 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말꼬리를 잡으며 반론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도 논문을 써내고 실험을 수행할 능력이 있지 않겠느냐고 해대면서 말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이제 겨우 물장구치는 학생을 바다에 내보내자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이라 생각하는가. 좋은 풀장을 두고 왜 굳이 바다에 내보내려 하는 것인가.
이상 언급한 학교의 기획을 제대로 누릴 학생들은 전교 400명 중 넉넉잡아 50명 남짓이다. 우리 아이들의 절대다수는 소수의 특혜를 위해 바다에 떠밀렸고, 결국 평등을 위해 기획된 학교에서 아주 불평등하게 익사해버린 것이다. 그렇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가짜공부라며 떠들던 참교육론자들 덕에 우리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교육에 전대미문의 너비를 자랑하는 사각지대가 등장한 것이다.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미래형 학습’이라는 폭력 앞에 교실에 있어야할 교사를 별실에 빼앗겨버렸으니 말이다.
교육? 살아있는 지식? 웃기지 마시라. 내 단언컨대 우리 학생들은 10년 전에 비해훨씬 멍청해졌다. 아, 그래. 그 호사스런 교육을 누린 명문대생들이야 당연히 멍청해지지 않았겠지. 교육 양극화 속에서 희생당한 절대다수의 보통 학생들은 어떡할 건데?
‘정시충’이란 말을 들어보셨는가. 내신을 이미 망쳐버린 학생들을 비아냥대는 표현이다. 현행 수시제도는 고교 3년 내신의 가중평균값을 반영하기 때문에, 재도전의 기회가 없다. 일반고 기준으로 보았을 때, 1학년 때 이미 특정 과목들 일부에서 3등급 이하를 받아버리면, SKY 수시입학은 꿈꾸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SKY를 비롯한 명문대학들은 내신 커트라인이 1점 초반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당 학생들이 기댈 곳은 수능 성적만 반영하는 정시 전형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이와 같은 절박한 학생들을 '정시충'이라 부른다. 그들이 이와 같은 하대를 받는 이유는 다른 수시전형(논술, 특기자 등)은 더 평등한 그 전형들(학교장 추천 전형 등)에 파이를 내준 탓에 경쟁률이 박이 터지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특목고생들이 우글거리는 헬(Hell)전형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면, '정시충'이 아니라 '정시러'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뭐, 내신시험을 제대로 못친 건 본인 탓이니 정시충 취급을 받는 것이 마땅한 처사일 수도 있겠다. 일견 인정한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수능이 들어야만 했던 비난을 떠올려보자. 단 하루의 시험으로 평가당해서 불합리하다는 그 비난 우리 한국인들은 수천 번도 더 들었다. 이런 살 떨리는 내신지상주의 외줄타기 생태계가 과연 그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는가. 결국 내신 전형도 워낙 치열하다 보니 단 하루의 시험으로 도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학교 내신 시험은 풍부한 학습을 보장하기는 할까. 불합리하기로 매한가지라면, 컨텐츠라도 좋아야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내신 시험이 다가오면, 교사들 대부분이 시험 문제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지 않을 독자들이 정말 많을 것이라 예상되는데,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자사고나 특목고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교들은 수학 지필고사에 출제될 문제를 미리 알려준다. 즉, 학생들은 교사가 일러준 그 문제만 달달 외워서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다. 즉, 한국의 고등학교는 학생의 수학 문제해결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해설지 암기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거리다. 이와 같은 교육폭거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수능은 어떤 문제가 출제될 것인지 모르기에 학생들이 교과서를 속속들이 탐독하며 배움의 보폭을 넓히지만, 내신(교내 지필고사)는 어떤 문제가 나올지 교사가 일러주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참교육? 자기주도학습? 창의교육? 교사를 믿어야 한다? 교사 당신들이 감히 그런 고귀한 표현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도 삶은 소대가리의 입꼬리는 쉴 틈이 없다.
자,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왜 내신이 소수만을 위한 시험일까. 문제는 공부를 뒤늦게 시작한 학생들에 있다. 중3 겨울 방학에 정신 차리고 공부를 시작한 탓에 아직 실력이 영글지 않아 1학년 내신을 망친 학생들이나 2학년 때나 정신 차리고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은 어떡할 것인가. 그 학생들은 학교의 평가시스템에서 소외되어 버리고 만다. 학생 본인 학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데, 내신 시험을 좇다가는 자신의 유일한 동아줄인 수능 시험을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내신 공부 따라가다 보면 수능 시험도 잘 칠 수 있다는 그 말, ‘쌩구라’라는 건 우리 20대 모두가 안다. 애초에 코드 자체가 다르다.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란 말, 폐기처분된 지가 오렌지다. 그렇다. 현행 수시 제도 아래에서 내신시험은 이렇듯 전체주의적이다. 학생들은 교사가 지정하는 지식만을 신앙 삼아야 하고, ‘재도전’ 내지 ‘뒤늦은 도전’은 시스템의 존엄을 위해 좌절당해야만 한다. 무엇인가 아주 격렬히 경직된 것 같지 않은가. 아주 부자유스럽다.
자,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다. 이 즈음 되면, 다들 대충 감이 잡혔을 것이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짓일까. 글머리로 돌아가자. ‘평등이란 구호를 레버리지 삼아 이익을 챙겼던 배덕자(背德者)들’과 ‘더 평등할 특혜를 누렸지만 침묵하기를 넘어 당당하기까지 했던 위선자(僞善者)들’ 좋으라고 하는 짓이다. 전자는 전교조를 비롯한 진보교육계와 결탁한 정치세력이고, 후자는 어른들의 농간으로 만들어낸 시스템에 기생하여 더 평등했던 그 학생들이다. 그리고 하나 더. 전편에서 서술한 입학사정관제의 최대 수혜자. 바로, 입시종결권을 쥔 그들. ‘교사’.
이 글을 쓰고 있는 연세대학교의 정문에는 건립 이념이 적힌 돌덩이가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과연 자유로울까. 왠지 모르게, 아니지, 왠지 알게 씁쓸하다. 오늘따라 달리 읽히는 전교조의 창건 이념으로 이번 편을 마치겠다.
교사가 행복해야만이 학생도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