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교회의 오적'이라는 말이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할 때 썼던 글입니다. 안타까워하며 탄식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이 글에서 거론된 한국교회(한국교회라 칭했지만, 한국 개신교를 대상으로 합니다)의 적폐, 없어져야 할 오적(五賊)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나빠졌죠. 더 타락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회복은 불가능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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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한국교회는 손봉호 교수 표현대로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집단입니다.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 많은 요인이 작용했겠지요. 그중 정말 고쳐야 할 다섯 가지 적폐, 한국교회 오적을 생각해 봅니다. 서로 연관되어 있고, 순서가 의미 없지만 생각의 흐름에 따라 적었습니다.
첫째, 자정 능력이 없는 한국교회 조직의 후진성
둘째, 후진적 구조에서 자라는 권력욕에 물든 목회자
셋째, 삯꾼 목회자를 키우는 우매한 평신도의 맹종
넷째, 창조과학으로 대표되는 교회 안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다섯째,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사용되는 혐오
첫째, 한국교회 조직의 후진성입니다. 담임목사는 교회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집니다. 이들을 감시·감독해야 할 교단과 노회의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봉건시대 영주제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감리회는 세습 방지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단 내 대형 교회들은 편법을 사용해 세습을 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목회자들에게 교단은 놀이터입니다. 대형 교회들이 내는 상납금이 얼마인데 교단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 있을까요. 힘없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나 큰소리를 내는 거지요. 기하성과 순복음교회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는 자정 능력이 없습니다. 자정을 할 의지도 없어 보이지만, 자정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조직이 없습니다. 목사들 종아리 걷고 회초리를 치고, 교회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때마다 외치지만, 보여 주기 위한 쇼이거나 실효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이는 교황에 권력이 집중된 가톨릭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부족한 교황이 세워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겠지만, 교황은 영향력이 너무 크기에 선출 절차도 까다롭고 내부적인 견제도 있습니다. 이에 반해 대형 교회 목사의 교회 내 권력은 교황보다 절대적이고, 내부나 외부의 견제는 별로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제도가 민주적일 수는 없습니다. 질서를 위해 목사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위임이 되면 은퇴할 때까지 보장되는 현 제도는 득 보다 실이 많습니다. 개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목회자를 만난 교회는 복이지만, 삯꾼이 담임이 되어 당회의 지지를 얻으면 누구도 견제할 수 없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합니다. 교회 내 항존직을 없애고 일정 기간마다 재신임을 하며, 교단·노회가 실질적인 감독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노회 내 권력 분산을 통한 적절한 견제 등도 필요합니다.
둘째, 이런 후진적 구조는 권력욕에 물든 목회자에게 힘을 줍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예수의 섬김을 몸으로 살아 내야 하는 목사가 오히려 세상적인 권력을 추구합니다. 목사 서열의 결정적 요소는 교회의 크기입니다. 신도 수가 얼마인지, 예배당을 짓는 데 얼마나 돈을 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더불어 노회를 비롯 그들의 리그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끼치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집니다. 정치를 통해 교단 임원이 되고 그 힘으로 새로 난 자리에 자기 사람을 세우며 권력을 키워 가는 모습은 세상 정치가 오히려 깨끗해 보이게 만듭니다. 세상 정치에는 최소한 민주적 투표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담임목사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집니다. 일주일에 최소 1번, 30분 이상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이 가지는 파워는 어느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주일에 1번씩 순종적인 마음으로 들으려는 국민을 상대로 방송 연설을 했다면 탄핵은커녕 지지율이 70%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설교권은 힘이고 그 힘을 가진 담임목사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십일조 안 하면 암에 걸린다느니, 빤쓰 내리라는 말을 들어야 내 교인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는 겁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원리 중 하나는 힘의 나눔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면 담임목사에게 향하는 권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큰 교회 목사는 가진 권력에 이미 맛이 들렸고, 작은 교회 목사는 그런 권력을 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 질서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직책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 취급을 하고, '주의종'이라는 구별된 호칭을 사용합니다. 교회 헌금의 십일조는 담임목사의 몫이라고 말하는 돈에 환장한 목사까지 등장합니다. 성적 타락은 권력의 부산물입니다. 힘이 있으면 휘둘러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물론 훌륭한 목회자는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목회자 여러분을 만나 배우며 선한 영향력을 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목회자들이 목사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작습니다. 파워를 가지지 않으려는 예수를 따라 사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비판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목사 세계의 세상적 질서를 향한 것입니다.
셋째, 우매한 평신도의 맹종이 삯꾼을 키웁니다. 교회 안의 질서는 중요합니다. 적절한 권위를 인정하며, 서로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평신도가 목사를 절대적으로 떠받들어야 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목사 잘 받들어 복 받은 사람, 혹은 목사 대적하다 벌 받은 사람에 대한 설교 듣지 않은 교인 없을 겁니다. 특히 권력욕이 강한 목사가 그런 설교를 잘합니다. 김홍도 목사가 목사를 끔찍이 섬긴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강조하듯이요.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뇌가 되었습니다. 목사를 제사장과 혼동합니다. 목사 비판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라 여깁니다. 매사에 스스로 해결하던 사람들도 목사 문제는 다 하나님에게 맡깁니다.
평신도의 우매함은 배우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설교를 절대적이라 여기며,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거나 신학을 공부할 생각이 없습니다. 주어진 본문에서 최대한 은혜로운 교훈을 끄집어내는 것이 전부인 큐티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렇기에 목사가 성경에 없거나 심지어 배치되는 이야기를 해도 분별을 못합니다. '만인제사장'이라는 언급하기도 식상한 원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평신도가 너무 많습니다.
목사가 잘못하면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교회를 위한다고 문제를 덮는 평신도 리더십도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목사 새로 오면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는 장로들이 잘한다는 거 아닙니다. 이들 역시 사라져야 합니다.) 장로를 비롯한 평신도 리더십은 목회자의 적절한 조력자이며 또한 감시자입니다. 비판적 지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무조건 지지 혹은 무조건 반대입니다.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배우지 못했습니다.
목사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떠나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인들은 타락한 목사와 공범입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교회에 충성'이라는 세뇌를 당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공교회(Universal Church)입니다. 어느 교회든 떠날 수 있는데,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출석 교회에 대한 충성 강요가 목사의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작동합니다. 각자 도생해야 하는 현 한국교회에서 타락한 목사를 떠나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줄고 도태되어야 그 목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기회라도 얻습니다.
넷째, 교회 안에 반지성주의가 팽배합니다. 신학교에서 분명히 그렇게 배우지 않았을 텐데, 목사는 교회에서 덮어놓고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 가르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으라 하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목사교 교리까지 더합니다. 평신도는 이를 아멘으로 받고 더 이상 알려하지 않습니다.
창조과학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의 일례입니다. 오랜 시간 과학적으로 점검되어 부정할 수 없게 된 사실까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는 창조과학을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받아들입니다. 코드가 맞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외부 지식과 충돌하고 그 지식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때, 자신의 믿음에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외부 지식이 사실인지 점검하는 과정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너무나 쉽게 '믿음'을 선택합니다.
주일이면 강단을 통해 퍼지는 창작된 예화들. 갓톡 등의 소셜미디어와 카톡을 통해서 전해지는 지라시들. 나중에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도 은혜받았으면 됐지 하며 넘어가는 태도. 거짓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을 텐데, 한국교회는 거짓에 너무 자비롭습니다.
가장 큰 책임은 목사에게 있습니다. 성도들을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신도 책임도 만만치 않습니다. '깨어난 평신도'가 목회자만큼 교회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정보가 널려 있는 세상입니다. 지라시만 읽고 WCC 이단이다 목소리 높이기 전에 WCC 선언문이라도 한 번 찾아서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혐오를 사용해 내부의 결속을 다집니다. 교회가 적으로 삼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동성애, 진화론, 이슬람, 종북. 누군가 집단 최면이라도 걸었는지 이 단어가 들리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흥분합니다. 이슬람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북한은 동성애자를 처벌하는데, 신기하게도 한국교회는 이 '사탄의 도구'들을 다 한 편으로 봅니다.
내부가 취약할 때 외부의 적을 찾게 됩니다. 부패한 목사들은 혐오를 사용해 자신들 치부를 가리고, 우매한 평신도는 사실 확인도 없이 혐오에 동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어 마땅한 죄는 다양합니다. 간음이나 부모에 대한 저주는 죽을죄입니다. 소나 양을 잡을 때 예물을 드리지 않아도 죽어야 하고, 풍족함에도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자는 끊어진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이슬람을 타깃 삼습니다.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적으로 삼는 이유는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종북은 탈북 교인들의 트라우마와 친정권 성향에서 왔습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에 혐오라는 답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거짓에 의지하고, 성도의 맹종을 요구하며 혐오를 유지합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갑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다섯 가지의 적폐. 한국교회 오적.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40년 가까이 한국교회에 머물며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제게는 안 보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가능할까요? 지금의 한국교회라면 예수님도 배척당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