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같이 일하던 단체로부터 돈을 받았다. 작년에 학교 동료와 함께 단체 지원금 공모를 썼는데 당선이 돼서 지원금의 1/5 가량을 나에게 '임금'으로 지불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안절부절못해서 어떻게 하면 돈을 다시 돌려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이 돈을 연구비 명목으로 단체 사람들에게 1/n을 해서 지불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했더니 그것은 돈세탁이라고 했다.
괜찮아, 단체 사람 중 한 명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돈으로 좋은 거 사. 자전거라던가.
수표를 받았지만 은행에 예금하지 못하고 서랍에 일주일간 넣어뒀다가 오늘 통장에 넣었다. 불편하기도 찡하기도 했다.
원래도 뚜렷한 정체성 없이 살았지만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장소에 따라 아무나 되었다. 이번 학기는 강의를 하지 않아서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것도 없어졌다. 요즘은 연구주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 공부를 하고 온종일 부동산 거래내역을 읽는다.
얼마 전 단체에서 통과시키려고 하는 법안에 대한 설명을 위한 행사를 주최했다. 일찍 도착하니 사람들이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중 얼굴이 낯익은 누군가가 나를 반갑게 쳐다보며 기계 잘 다뤄? 하고 (기계치인 나에게) 물었다. 프로젝터의 화면이 스크린에 지나치게 작게 보였다. 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프로젝터는 하루종일 말썽을 부렸다. 나는 무대 뒤쪽에 앉아 프로젝터 옆에서 화면이 불안정할 때마다 어떻게든 고쳤다. 발표는 무사히 끝났다. 단체 사람들이 준비한 발표와 주민들의 반응을 관찰하고 기록하러 왔는데 그날 노트를 꺼내보지도 못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대학원에 오기 전까지 연구활동은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를테면,
현수막 만들기. 그 현수막을 들고 시청 계단 위에 서 있기.
전단지 붙이기.
시 의회에 법안 통과하라고 편지 쓰기.
행사장에서 음식 차리기. 그 음식을 배급하기. 그 음식을 치우기.
행사장에서 접힌 의자를 펴서 배치하기. 그 의자를 다시 접어서 제자리에 놓기.
행사장 구석에서 단체의 로고가 들어간 기념품 팔기 (가끔 누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면 그냥 사주기)
아이들이 기념품 안 훔쳐가게 감시하기 (위해서 놀아주기).
단체의 발표가 끝나고 의자를 접어서 치우고 있는데, 청중석에 있던 전에 같이 수업을 들은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잠깐 근황을 나누었다. 친구가 물었다. 이 단체에 관해서 졸업논문을 쓰는 거야? 아니,라고 답하자 친구가 의아해했다. 너는 이 단체에서 엄청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 같던데. 그러게 말이다. 평소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친구가 묻자 대답이 똑바로 나와서 스스로에게 놀랐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쓰면 이 사람들한테 쓸모가 없는 연구잖아.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제일 잘 알 텐데. 시 정부의 토지정책에 대해 쓸 거야. 이 사람들 '입장'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잘 안 보인다. 우리가 마주 보고 있지 않고 서로에게 얘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이 보고 있는 풍경이 잘 보인다. 시청의 계단에서 현수막을 들고 있을 때도 프로젝터를 고칠 때도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대상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오랫동안 단체와 4월에 주최하는 행사를 준비했다. 섭외요청을 하고자 게스트와 미팅을 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게스트는 앞서 언급한 프로젝터를 고치러 간(?) 행사의 발표자였다. 우리가 주최하는 행사일에 게스트는 보스턴에 있을 예정이지만 우리를 위해 뉴욕으로 오겠다고 했다. 우리가 감동에 벅차 고맙다는 말을 연신하자 그가 말했다.
네가 거기 항상 있었잖아. 항상. 그는 always 라는 말을 서너번 반복했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가, 하고 스스로의 기여한 바에 대해 고민할 때면 그들의 너그러운 어투를 떠올렸다. 네가 오늘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장소 중 여기를 선택해줘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