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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Mar 27. 2024

바람과 파도

뉴욕에서의 5년

저 여자가 5년 뒤에도 살아 있을까? 그의 손등에 나이테처럼 진 주름들을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대학원 면접에서 처음 마주한 나의 지도교수가 될 사람은 70대 중반의 백인 여자였고 출근길의 뉴요커들보다 3배쯤 느리게 걸었다. 나의 걱정을 읽은 마냥 그는 매일 새벽 6시에 수영을 한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 나보다 건강하잖아?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나 그가 치매 증상이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렸다. 1년 뒤 코로나의 등장과 동시에 그는 은퇴를 했고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사람들은 내가 슬퍼할 거라 생각하며 위로를 건넸다. 정작 나는 슬픔을 느낄 만큼 그와 보낸 시간이 없었으며 5년짜리 전세계약을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지 약 1년이 지났을 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뉴욕의 대학원을 선택한 것은 뉴욕이 주거 불평등이라는 연구 주제를 공부하기에 최적화된 도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막상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면 무언가를 배운다는 짜릿함보다 나의 멍청함을 들킬까 봐 조바심을 느꼈다. 나는 학교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낯선 곳에 가는 것은 내가 가장 익숙함을 느끼는 배움의 방식이었다. 이스트 뉴욕이라는 동네를 알게 된 것은 페이스북 공고를 통해서였다. 뉴욕시는 3년 전 재개발을 촉진하는 목적으로 이스트뉴욕의 토지 사용 규제를 완화했다. 그 이후 부동산 투기가 극심해졌고 페이스북에 공고된 모임은 그에 대한 주민들의 대책회의였다. 이스트뉴욕은 맨해튼에서 한 시간 반동안 지하철을 타야 갈 수 있었다.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지하철 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짙어졌고 창밖의 건물들이 낮아졌다. 이곳은 여기에 사는 사람들만 가는 동네라는 것을 직감했다. 


도착한 장소는 어느 학교의 체육관이었고 그곳은 수십 명의 주민과 시에서 나온 공무원 몇 명으로 가득 찼다. 30, 40대로 보이는 백인 공무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중장년층의 흑인들이거나 간혹 동남아시아인들도 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다 알고 있는 듯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농담을 걸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공기에는 절박함과 분노가 뒤섞였다. 동네 주민들은 밤낮으로 집을 팔라는 투기꾼들의 방문과 전화에 시달린다고 했다. 누군가는 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해서 집이 넘어간 이웃들 특히 노인들에 대해 말했다. 이스트 뉴욕에 30년째 살고 있다는 사람은 자신의 집은 상품이 아닌 다음 세대들이 살 터전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의 집은 대문 앞까지가 아니라 이 동네구나. 땅값 오른다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네. 나는 그 자리를 구경했다. 


며칠 후 어떤 활동가로부터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민운동을 조직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첫 모임에서 나와 활동가를 제외한 모두가 이스트 뉴욕의 토박이들이었다. 그들은 토지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소유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했다. 개발자나 투자자가 아닌 이스트 뉴욕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땅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세우고 싶어 하는 시스템은 당시 나의 지도교수의 오랜 연구 주제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그 시스템에 대해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했고 나의 지식으로 그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지식이라고 해봤자 그 시스템에 관련된 논문을 한 두 편을 읽어본 게 다였지만 이방인인 나를 안 껴줄까 봐 나를 좀 더 숭고하게 포장했다. 자기소개를 나눈 뒤 우리는 앞으로 이 조직을 어떻게 끌어갈지 고민했다. 그런데 땅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지?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아이 돈 노우. 나의 밑천은 예상보다 일찍 드러났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동네의 땅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동네에 공터가 어디 있는지, 그 공터의 소유주는 누구이며 왜 아무도 아직까지 개발을 안 했는지. 그리고 이 공터들을 무엇으로 개발할 수 있을지. 우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이스트 뉴욕에 위치한 공터들 앞에서 책상과 의자를 펼쳐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 공터에 무엇을 지으면 좋을지 물었다. 우리는 시 정부 소유의 땅이 몇 군데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동네사람들을 모아 그곳들의 재개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을 가지고 몇 년째 그 땅의 개발권을 우리에게 달라고 시에 요구하고 있다. 


언젠가 나는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그들에게 쓸모가 있을 만한 연구주제를 물었다. 당시 그들은 여러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들의 제안은 연구비와 데이터와 능력이 없는 내가 하기에 버거운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능력 한에 빨리 끝낼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했다. 이 단체사람들이 이스트뉴욕의 인구를 잘 대변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조사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나쁜 아이디어인지 알려주었다. 우리가 이스트뉴욕 사람들인데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연구의 결과는 그들을 공격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맞는 말들이었고 내가 풀이 죽어 보였는지 누군가가 말했다. “We all are learning.” 


그들이 있는 자리에 가면 무엇을 배운다기보다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 알게 되었다. 연대란 사회개혁을 도모하며 이해관계와 정치철학이 맞는 사람들의 결실, 이라기보다 행사 시작 직전에 고장 난 프로젝터를 어떻게든 같이 고치려고 애쓰다가 싹텄다. 나는 지식으로 그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아주 빨리 접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하는 공부를 그들이 더 잘 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에게는 땅이 없고 근 미래에 이 도시가 그들에게 땅을 줄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은 중요한 목표이지만 이스트 뉴욕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그것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모르게 되었고 그것은 다음에도 그곳을 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스트 뉴욕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hole’이라는 동네가 있다. 하수도시설이 없어서 비가 올 때마다 물이 고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가 올 때마다 길이 물에 잠겨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고 했다. 2년 전부터 시 정부에서 동네의 재개발을 추진했으나 하수도 설치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비가 온 다음 날 이스트뉴욕 사람들과 함께 가본 동네에는 골목마다 작은 연못만 한 웅덩이들이 고여있었다. 


이스트뉴욕 사람들과 Hole의 재개발에 관여를 할지 안 할지 의논하던 날이었다. 한 시간 정도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고 그래서 얼마나 바쁘고 더 이상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이지 않은지 장황하게 의논하고 내린 결론은, ‘모른척할 수는 없다.’였다. 그들은 비가 올 때마다 hole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재개발 추진을 위해 시에서 마련한 자리가 생길 때마다 몰려와 동네의 제대로 된 인프라를 설치하기 전에 개발에 대한 논의는 있을 수도 없다고 으름장을 냈다. 나 또한 공무원들의 쫄아있는 표정을 놓칠까 그 자리를 지켰다. 반년 간의 항의 끝에 시 정부는 임시 하수도 시설을 설치했다. 도시계획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안부 전화가 누군가를 살리는 것을 봤다. 


억압과 저항은 바람과 파도처럼 한쪽이 거세지면 다른 한쪽도 강하게 몰아쳤다. 내가 읽은 많은 학술적 지식들은 그 풍경을 위에서 관망했다. 그 관점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비생산성을 의논하기 이전에 그것은 재미가 없었다. 내가 하는 연구에 대한 얘기 하면, 우울하지 않냐, 지치지 않냐 하는 반응을 종종 마주했다. 도시계획의 부당함은 나와 연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접점일 뿐 그들이 그 자체이거나 산물은 아니다. 어떤 심각한 사안을 얘기하는 자리이건 단 한 번도 농담이 오가지 않는 현장을 본 적이 없다. 전에 듣던 수업에서 도시의 빈부격차에 관한 얘기를 하던 중 학생 한 명이 물었다. 억압과 핍박에 지쳐 저항 할 힘마저 없는 곳은 어떡하냐는 그런 질문이었다. 교수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정말로, 모두가 무기력해서 아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그런 공동체를 실제로 본 적이 있어? 


그리고 나는 ‘지는 싸움'이라는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어떤 싸움이 지는 싸움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나는 아직도 뉴욕이 피자가 맛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장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적은 수입의 반 이상을 월세로 쓰다 보니 나는 5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보다 가난해졌고 하도 고구마만 먹고살아서 고구마를 완벽한 밀도와 당도로 찔 줄 아는 기술이 생겼으며 바퀴벌레와의 오랜 동거로 미국계 바퀴벌레와 독일계 바퀴벌레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이 집 같지는 않은데 뉴욕 바깥을 나갈 일이 있으면 뉴욕에 있을 때가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도시를 척박하게 만든 것들은 도시를 비옥하게 만들려는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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