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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tuti Nov 19. 2022

딸이 자살시도를 했다

코로나 여파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지난 6월의 첫째 주말,  셋째를 낳은 지 두 주가 채 안된 일요일 6시도 안 된 이른 아침 큰 아이의 구토 소리와 절규하는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신 시부모님께서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가 주시고 혹시라도 배탈이 났으면 균을 신생아에게 옮기게 될까 아이의 구토 뒤처리를 도와주셨다. 전날 저녁 먹은 연어장이 잘 못된 것일까? 씹지도 않고 삼킨 오렌지색 연어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걸 보고 가족들은 서로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큰 아이는 계속해서 속을 비워냈다. 


따뜻한 물을 먹여도, 소화제를 먹여도, 게토레이를 먹여봐도 5-10분에 한 번씩 화장실을 오가며, 아니 화장실까지 걸어가지도 못하고 분수처럼 입에서 삼킨 것을 토해내며 아이가 축축 처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둘째의 생일파티가 있는 날. 일요일이라 평소 가던 소아과는 문을 닫았고 임시방편으로 아빠와 할머니가 Urgent Care에 데리고 갔고 원래는 산후조리하는 나 대신 아빠가 둘째의  생일 파티에 호스트로 일해주기로 했지만 할 수 없이 나는 신생아를 데리고 시아버지와 둘째 아이의 생일파티를 하러 갔다. 시아버지는 동내 지리도 잘 모르시고 운전이 서툴어 내가 운전을 했다.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시아버지라 생일 파티 담당자와 이야기하고 엄마들과 이야기하고, 아이들을 챙기고, 고개도 못 가누는 아기를 Moby wrap으로 안아 우는 아기를 달래고 젖을 먹이며 둘째 사진을 찍어주느라 두 시간 내내 아이를 매고 서 있었다. 생일 파티를 하면서도 언제나 연락이 오려나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파티를 마칠 때쯤 Urgent Care에서 너무 많이 기다렸는데 아직도 의사를 보러 진료실에 못 들어가서 어린이병원 응급실로 향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선물을 풀고 남은 케이크를 챙기며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한숨 놓았구나 싶어 전화를 받는데 남편이 오열을 한다. 큰 아이가 타이레놀을 먹고 자살시도를 했단다. 그것도 모자라 손목에 면도칼로 그은 자해 자국 여러 개가 손목시계와 팔찌 속에 숨어있었단다.


제대로 앉아서 쉬지도 못하고 다시 아기와 둘째, 시아버지를 챙겨 응급실로 갔다. 보호자 2명만 들어올 수 있어 그 길로 둘째와 아기는 시부모님께 맡기고 큰 딸을 마주했다. 링거를 맡고 힘 없이 축 쳐 저서 잠들어 있는 딸. 도대체 무엇이 널 힘들게 했니? 그 이유가 나 일까 봐 겁이 났다.



큰 딸은 그 후 열흘간 몸속에 타이레놀을 IV로 씻어내며 아동병원에 입원을 했다. 속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는 날들이 많았다. 24시간에서 36시간마다 간호사가 와서 팔을 찔러 피를 뽑아가며 간 수치를 측정했다. 의사가 최악의 경우엔 간 이식을 해야 하는데 그건 아동병원이 아닌 근처 다른 병원에서 해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큰 딸이 병실에 있는 동안에도 옆 병실에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자살시도를 해 병원에 입원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오는 3-4시간을 재외 하곤 24시간 큰 딸과 붙어 병실을 지켰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딱딱한 소파 배드에 누워 잠을 자고 낮엔 심심해하는 딸아이와 카드놀이를 해주고, 3-4시간마다 딱딱하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유축기로 짜 가며 열흘을 보냈다. 딸은 그러는 동안에도 그리고 아직까지도 정확히 뭐가 힘들어 자살시도를 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다 잘하고 싶었고 계속 계속 그 채워지지 않는 완벽함을 채우는 것에 지쳤단다. 100점을 맞아도 105점을 위해 엑스트라 크레디트 과제를 하느라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단다. 피부색은 자신의 노력으로도 고쳐질 수 없고 자신이 한국인의 자녀라는 건 날 때부터 시민권자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거의 백인들만 있는 학교에서 농담 식으로 매일매일 당하는 인종차별에 아이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동병원은 몸에 관한 치료만 해 주기에 아동병원에서 태원 하는 길로 청소년 정신병원에 응급입원을 해서 일주일을 더 보냈다. 워낙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시도를 하고 힘들어하는 시기라 근처 청소년 병원은 자리가 없어 2시간 넘게 떨어진 곳에 아이를 보냈다. 아이를 내려다 주고 돌아오는 그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차도 잘 안 다니는 캄캄한 그 밤길을 달리면서 우리도 암흑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언제쯤 우리에게 빛이 보일까? 칼로 가슴을 도려낸 듯한 이 아픔엔 언제쯤 살이 차 오를까?


큰 딸에게 내가 신경을 쓰는 동안 신생아인 막내딸은 시부모님의 손에 키워졌다. 2-3시간마다 깨서 울어대는 아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우유병과 기저귀를 가지고 보초를 서셔야 했다. 남편은 운전을 하다가도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나와 전화를 하다가도 오열을 터트렸다. 아무런 싸인도 읽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어디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힘들어했다. 하지만 부모라 주저앉을 수는 없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아이의 병실에 들어섰고,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고백을 했다. 둘째는 아무도 누나가 왜 병원에 갔는지 정확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말을 못 하는 아기와 영어를 못하는 조부모님과 한 집에 있으면서 말을 잃어갔다. 그저 컴퓨터와 유튜브만이 유일한 소통처럼 모니터 빛에만 의지한 채 몇 주를 버텼다.  아기의 4주 발달검사를 위해 병원에 갔을 때 소아과 의사는 아기의 몸무게가 급격히 줄은 것을 걱정했다. 소아과 의사 선생님도 우리 큰딸과 둘째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딸, 아들이 있기에 큰 딸의 걱정을 많이 해 주셨다. 


죽을 것 같던 그 시간들을 지나 이제 날씨가 쌀쌀해지고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니 숨쉬기마저도 힘든 순간 속에서도 사랑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이웃이 있었다. 

우린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아들의 친구 부모와 교회에서 집에 찾아와 아들을 데리고 나가 하루에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고 같이 놀아주고 다시 집에 데려다주었다. 큰 아이의 학교 사역을 하는 분은 병실로 꽃을 보내주셨다. 시부모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도와주셨다. 큰 아이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선 어떻게 학교에서 개선을 할 수 있을지 나와 함께 문제 해결에 동참해 주셨다. 그리고 8월, 학교가 개학했을 때 매주 월요일 DAM Monday라는 시간을 가지며 인성에 대해서 청소년기의 정신과 신체적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덕분에 작은 아이는 숙제 없는 중학생 시기를 보내고 있다. 


코로나 시기에 끊었던 교회를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한국교회를 다니고 있다. 말씀이 아이들의 가슴에 살아 숨 쉬면 아이들의 자존감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모습으로 회복이 될까 싶은 마음에 선택을 했다. 같은 피부의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 안에서 더 단단해져서 이겨내고 바로 설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매주 아이 손을 잡고 교회를 간다. 


큰 딸의 책상을 거실로 옮겨 숙제가 있어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면 거실 소파에서 같이 기다려 주는 남편에게 감사드린다. 눈만 마주치면 안아달라고 나에게 안기는 13살 큰 딸이 고맙다. 언니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 막둥이가 고맙고 누나에게 같이 자 달라고 때를 쓰는 아들이 고맙다.


내 딸이 이렇게 살아 숨 쉬며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동안 내 딸의 친구는 우울증으로 오빠를 잃었다. 더 이상 이런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 번 더 꼭 껴안아 주고 싶다. 

네가 살아 있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네가 없는 세상은 불이 꺼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상상하기도 싫구나. 너 자신의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럽다. 내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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