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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랬구나', 얼굴 붉히기는 이제 그만

유시민 - 『국가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 반드시 나와 관련된 유용한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이나 지식을 제외하고 논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이지 못한 공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축구에 대해서 일자무식인 내가 손흥민 선수의 플레이를 보고 '축구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이해의 폭도 좁고 즐기기도 어렵다. 그러나 만약 학창 시절의 축구 경험을 떠올린다면? 축구와 다른 스포츠와의 공통점을 연상한다면? 그땐 손흥민 선수의 플레이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리고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축구엔 유용하지 못할 수 있으나 적어도 나 자신에게 새로운 생각, 창조이며 그것만으로도 유용하다. 나는 국가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첫 질문은 이것이다. 국가와 나는 어떤 관계에 있나? 내게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는 평생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았다. 국가는 내게 4대 의무(국방/납세/교육/근로)를 지웠고 나는 대체로 잘 지켜왔다. 국가가 정한 법을 큰 반감 없이 잘 따른다. 이런 저런 사상에 매료된 적이 있으나 대한민국을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속한 국가가 익숙하고 편하다. 요즘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큰 행운이라고도 생각한다. 국가에 대해 대체로 만족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나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동의하는 국민이다.


여기서 나는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국가를 '집단'으로 치환하려고 한다. 국가에 대해선 편협하고 소극적인 입장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좀더 일반화 된 '집단'에 대해선 보다 다양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국가에 대해 간접적인 공감을 하면 더 깊이 있는 사고를 가능하겠다고 믿는다.


나는 가족 구성원의 일원이다. 여기서도 소극적인 편이다. 다만 국가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나는 국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 없다. 반면,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참여하고 싶다. 그러나 부모님은 의견을 완고하게 고집하신다. 가족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없다. 가끔 누나들에게서 듣거나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지나가듯 말하는 것을 듣는다. 나는 강제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나는 '정부는 소통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국민들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디에서나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에 속한 집단에서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학생과 팀원으로서 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질문하고 주장했다.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일체감, 책임감 그에 따른 만족감도 느꼈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국민 모두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그들을 이해해보고 한편으로 그들의 넓은 품에 놀라움을 느낀다.


대학 입학을 하자마자 나는 과대가 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대학 생활 내내 팀장, 조장, 동아리 회장 등을 도맡아 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팀원으로서는 설득력이 없다.' 혹은 '내가 하면 더 잘하겠는데?' 같은 생각들을 했다. 나는 적극적인 공동체의 일원에서 규모는 작지만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경험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작은 공동체라도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과 리더로 참여하는 것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아무리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한들 리더에게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책임감 역시 리더가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와 공동체의 목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 또 그들 간의 조화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자리가 그에게 강요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돌이켜보면 나는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줄만 알았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나와 비슷하게 행동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이는 큰 오산이었고, 현실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는 실패했다. 나는 자유방임형 리더였다. 목표를 제시하고 팀원들을 독려했지만 그들의 행동을 이끌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왜 저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보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나무라는 정치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인격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여러 상이한 태도를 보인다. 나 역시 집단에 대해서 여러 상황을 겪었고 여러 태도를 보였다. 나는 크게 4가지의 태도를 경험했다. 맹목적으로 동의를 하는 국민, 강제로 소극적이게 된 아들,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팀원, 자유방임형 리더. 집단을 대하는 여러 태도는 국가를 생각하는 여러 관점과 비슷한 점이 있다. 따라서 나는 나의 4가지 태도를 책에서 제시한 국가론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았다.  


맹목적으로 동의를 하는 국민에게 어울리는 국가론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떠올리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만약 유신체제에 살고 있었다면? 나치의 독일에 살고 있었더라면? 그때에도 맹목적인 동의를 할까? 알 수 없다. 다른 나라의 체제나 역사에 대해 읽고 들은 바가 조금 있다. 이것으로 내가 국가를 이성적인 태도로 동의한다고 여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현실에 익숙한 나머지 사고에 편향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나 역시 크게 잘못된 길에 빠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깨닫는다. 이런 태도로 국가를 대하는 이에겐 국가론은 의미가 없다.


강제로 소극적이게 된 아들에게 어울리는 국가론은 무엇일까? 나는 3장에 제시된 '계급지배의 도구'를 떠올린다. 부모님은 확실히 내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집안일에 관한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님은 내게 강력한 권위를 내세운다. 나는 부모님의 태도를 떠올리며 마르크스의 견해에 일부 공감한다. 마르크스는 '국가는 지배계급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가족운영을 부모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나는 가족을 해체해야 할까? 이 생각은 많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마르크스는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국가론을 제시했다. 그의 국가론을 가족에 적용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현실에서는, 어울려 살 수 있는 것은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그것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우호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독점적 우위를 점하려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게 나쁘지 않은 것처럼,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사는 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부분에서 나는 오히려 만족하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팀원으로서 나는 집단의 강제력에 불편함을 느꼈다. 대체로 군필자에 나이 많은 형이 리더를 하였고, '내 말 들어, 이렇게 하는 게 좋아'를 표어로 내세우며 행동을 강요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때에 '합법적 폭력'을 다루는 국가와 같은 집단을 경험했다. 리더로서는 목표를 위한 의지와 팀원들을 위한 마음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소극적인 입장이었다면 그를 충분히 좋아했을 테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입장으로서는 그러한 부분이 상당히 불편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기와도 생각이 다를 때가 많았다. 많은 친구들이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앞에서 강하기 이끌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만약 내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었다면 비슷한 감정을 더 강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비록 나는 정치에 소극적이지만, 나같은 사람까지 생각해서 정치 활동을 하는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자유방임형 리더로서 나는 '공공재 공급자'의 기능을 하는 국가와 닮았었다. 나는 팀원들이 번거로워 하는 일들을 도맡아 했다. 연락을 하고, 예약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발표를 했다. 공공재를 공급하듯이 이런 것들을 내가 처리하고 팀 운영에 팀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했다. 기대와 현실은 많이 달랐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하이에크의 자유방임보다는 케인즈와 같은 적절한 강제가 집단운영에 효율적임을 깨달았다. 나는 국가운영을 맡아본 적이 없지만, 구성원들이 모두 인간인 것과 인간은 자발적인 불편함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20대를 보내며 집단에 대한 4가지 태도를 동시에 겪었다. 그리고 그 4가지는 책에서 제시한 3가지 국가론과 맹목적인 국민에 접할 수 있는 태도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맹목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보수적이고, 한편으로는 진보적이다. 자유를 추구하기도 하면서 강제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조금 놀랍다. 내가 일정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다른 입장을 동시에 긍정하는 줄을 몰랐다. 책에서 제시한 3가지 관점을 통해 나를 돌아본 것이 내게 이런 방식의 유용한 생각을 낳도록 했다.


나조차도 상황에 따라 이렇게 중구난방인 태도를 보인다. 나는 이 생각에 꼬리를 물어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해본다. 타인을 잠깐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은 굉장한 자만이다. 그도 역시 상황에 따라 어울리지 않는 여러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집단의 리더나 주권자로서 구성원들을 잘 이끌 방법 중 하나도 상황 조성에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미 경제사회에선 행동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이용해 이를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운영에는 이러한 상황조성과 심리적 유인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니,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는 자연스레 책에 드러난 여러 관점을 통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내게 여러 관점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와 다른 태도를 지닌 이들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이 진보와 보수의 완벽한 화해를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의 관점을 한번 쯤 돌아보면 감정적인 화해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작가는 서문과 맺음말에서 이와 같은 의도를 드러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 그 의도를 실천하고 깨달았다는 점이다. 정치인이자 한때 정치인이었던 작가로서, 유시민은 우리에게 단순히 정보 전달만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자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간접적으로 생각의 변화를 유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는 그 의도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추측한다.


'아하 그랬구나', 얼굴 붉히기는 이제 그만.





※ 본 글은 2020년 3월.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난 후 감상을 정리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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