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코드 햄스터 Dec 17. 2020

많이 읽을 수록 보이는 것

유시민 『항소이유서』


처음 읽었을 땐 정말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G렸다…'

두 번째 읽으면서 내용을 정리했다. 참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 읽었을 땐 조금 이상했다.

네 번째 읽었을 땐 '그다지 유익한 글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왜 굳이 네 번이나 읽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책임감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매주 참여하는 독서모임에서 책 선정과 진행의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이 글을 선택했다. 막상 읽고 보니 남들이 진행했던 책보다 너무 짧았다. 약간의 미안함과 책임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얇은 책 한 권 읽을 시간만큼 공을 들였더니 4회독이 됐다. 


어쨌든 4번이나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든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좋은 글임에는 확실하지만, 읽을 수록 흥미가 떨어진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읽을 수록 흥미가 떨어졌던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서서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내 감상을 뒤엎은 결정적인 부분이었다. 




논리에 관한 비판


우선 글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행위 정당화 (논리적인 서술)
2. 정권, 경찰, 검찰, 재판부 비판
3. 항소이유
4. 투쟁 정당화 (스토리텔링) 


글의 본래 취지는 항소이유를 밝히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부분은 굉장히 짧다. 대신 사건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자신의 행위, 투쟁을 정당화하거나 정권과 관련 기관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또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부분이다. 


이 글에 대해서 '논리적이다'는 반응이 많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초반부의 내용 때문일 것이다. 내게도 이 부분은 좋은 첫인상을 주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항소이유서의 이 부분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작가가 본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논리를 크게 2가지로 보았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양심과 법률이 모순관계에 서지 않는다.
모순이 있는 사회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따라서 나는 양심을 따랐다.     


국가는… 구성원 모두에게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나는 투쟁했다. 


얼핏 보면 상당히 깔끔하다. 나 역시 처음엔 굉장히 논리정연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문장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았고, 따라서 위의 논리적 맥락이 인식되었다. 그리고 곧 이상한 것을 느꼈다. 

다시 위의 2가지 논리 흐름을 간단히 하면 다음과 같다. 


- A이어야만 한다
- 하지만 A가 아니다
-> 따라서 A이기 위해 나는 행동했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다. 이 흐름만 보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논리 진행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학에서 연역추론을 따질 때, 타당성 뿐만 아니라 건전성도 살펴본다. 논리를 구성하는 전제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의 논리적 약점이 건전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A이어야만 한다'에서 A는 다음과 같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양심과 법률이 모순관계에 서지 않는다.

국가는… 구성원 모두에게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 두가지 전제가 옳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법과 양심의 모순이 없을 수 있나? 아무리 훌륭한 법이라고 하여도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 기준으로서 양심과 모두 일치할 수는 없다. 


국가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가? 자유가 무엇이고 어느 정도까지 보장해야 하는 것인가? 자아실현, 행복추구를 위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국가인가? 1985년이 되기까지 한반도에 그러한 국가가 단 한번이라도 존재한 적이 있었나?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당시까지 한반도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단지 사람들의 상상과 믿음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작가가 본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타당하지만 건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위의 두 가지 A에 대해 공감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왜일까? 언제나 이상을 추구하는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인간관계에서도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말 잘하는 것'이 되듯이, 진실과 감정적 동의는 상반되기도 한다. 나는 두 가지 A가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을 잘 담았기에 우리가 감정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핵심이 되는 전제는 검증이 필요한 명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기에 우리는 감정적인 동의를 한다. 이 동의를 기반으로 명료한 논리적 형식을 따랐다. 우리는 이 글을 '논리적으로 훌륭한 글'로 착각하게 된다.   




많이 읽을 수록 달리 보이는 것


나는 논리의 측면에서 이 글을 비판했지만,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이다. 한두 번 읽었더라면 내 수준에서 이런 비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복해서 읽을 수록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문장의 아름다움, 스토리텔링, 감정이입 등이 점점 덜 느껴졌다.

작가의 의도, 목적, 글의 구성, 명제의 사실 여부, 주장의 깊이 등에 대한 생각이 점차 들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읽을 수록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을 세우게 됐다. 동시에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글'에 대한 요소도 조금 깨닫게 됐다.  




설득에 있어서는 완벽한 논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네 번째 읽으면서 '그다지 유익한 글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전에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 작품이 만든 기대치 때문이었다. 작가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유익함을 자주 경험했었다. 그래서 이 '항소이유서'에서도 그러한 유익함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유익함을 주는 것이 아니다. 유익함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남을 설득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서 명제에 관한 철학적인 고찰은 한다면 오히려 애매한 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글, 설득하는 글, 감정적 동의를 얻는 글. 이러한 부류의 글은 이렇게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글에선, 필연적으로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구구절절 따지는 것과 감정적 동의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설득의 3요소는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이다. 로고스는 논리와 근거, 파토스는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 에토스는  그 사람의 이미지와 관련된다. 로고스보단 파토스가 중요하고, 파토스보단 에토스가 설득에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뢰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논리와 근거가 탄탄한 것은 비교적 덜 중요하다.


앞서 살펴본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인 A에 대해, 우리가 고개를 끄덕인 것은 A의 사실여부(로고스)와는 관련이 없었다. 유시민이라는, 시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서울대학생이라는 점(에토스)과 우리의 이상을 자극하는 문장(파토스) 때문이었다.




훌륭한 글, 아름다운 문장


비판적인 관점에서 리뷰를 하였지만, 이 글이 훌륭한 글임에는 양손을 번쩍 들며 동의를 한다. \^_^/

'설득적인가?'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만점에 가깝다. 읽는 순간 몰입이 되는 아름다운 문장, 이해가 쏙쏙되는 구성, 독자에게 여러 감정(책임감, 미안함, 분노, 대견함 등)을 느끼게 하는 사실 전달 등. 좋았던 부분이 많다.


글 자체도 좋지만 글쓴이에 대한 존경심도 생겼다. 작가는 이 글을 머리로 정리하고 한번에 써내려갔다고 한다. (후덜덜;;) 이런 극한 상황을 겪으며 투쟁하는 것은 도저히 나로선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도 더욱 커졌다. 만약 두 번 정도 읽고 글을 썼다면 찬양만 늘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후반부, '법관을 지망하는 촌뜨기 소년' 부분부터 끝까지는 정말 너무 좋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한글이 이렇게 아름답게 활용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러가지로 운이 좋았다. 이 글을 읽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렇고, 네 번이나 읽은 것도 그렇다. 찬양하며 읽고 또 비판적으로 읽으니 깨달음의 깊이와 양이 상당했다. 우선 이 글이 좋은 글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유시민 작가의 『항소이유서』를 읽으신 분에겐 나의 관점이 유용하기를 바란다.

아직 읽지 못했다면, 나의 비판적인 관점은 잊고 우선 글의 첫 인상을 충분히 느끼기를 권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부자 아빠 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