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물성』 읽다가 든 생각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소설은 '감정의 물성'이라는 아이템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감정의 물성이란, 그것을 만지고 경험하는 것으로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물건이다. 이 물건에 따른 사회와 주인공들의 반응이 주요내용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나의 이목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위에 제시한 물음이었다.
(이 글은 위의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옮긴 것이다. 나의 생각은 과학이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주워들은 것을 가지고 상상하는 능력이 내가 가진 전부다. 이 글도 나의 상상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사람들이 두 가지 모두 긍정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1. 눈앞의 마시멜로우를 두고 '먹지 않겠다'고 약속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참았다. 우리는 이를 보고 '아이가 감정을 통제, 절제'한다고 생각한다.
2. 세상에 대한 비관을,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권한다. 그는 약을 처방받는다. 감정이 나아진다. 자연스레 비관적인 생각이 사라진다. 우리는 이를 보고 '그가 감정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패턴은 아주 흔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때로는 사람이 감정을 통제하고, 때로는 반대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종종 감정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성'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성=나', '감정=내가 아닌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금연에 성공한 사람은 '내가 힘들게 참았다'고 말한다.
금연에 실패한 사람은 '나는 안 피우려고 했다.' 혹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식에 기대어 보면 '때로는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고, 때로는 반대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결론이 옳은가? 다음의 이야기를 보자.
1. 공부를 해야 한다.
-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르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번다.
-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러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
2. 술을 마셔야 한다.
-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우울한 생각이 사라진다.
- 술을 마시지 않으면 우울증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위의 두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따랐다.
A이어야 한다.
- A이면 좋은 점
- A가 아니면 나쁜 점
같은 형식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1.)에 대해선 '이성적이다, 논리적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2.)에 대해선 '감정에 휩쓸려 변명한다, 충동적이다.'고 말한다.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고의 형식을 따랐지만, 결과를 보고 우리는 감정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감정과 이성을 가르는 명확한 구분은 무엇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이성과 감정의 구분은 '느낌과 상식'에 기반한다. 둘의 경계가 모호하다.
감정과 이성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다면, 무엇이 무엇을 '통제한다'는 것을 따질 수 있는가?
질문 - '나(이성)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상식적인 답 - '때로는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고, 때로는 반대다'
이상한 점 -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모호하다.'
감정과 이성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다면, 무엇이 무엇을 '통제한다'는 것을 따질 수 있는가?
여기까지 생각을 하면 첫 질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질문이 옳은 것인가?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에 담긴 전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 -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질문에 담긴 수상한 전제를 찾았다.
'감정과 이성은 다르다.'
'나는 이성적 존재다(= 나는 감정이 아니다)'
'이성(나)이 본래 감정을 통제한다고 믿었다' (이 믿음에 의심이 생기니 혼란을 겪음)
'감정vs이성'과 같은 구분.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반대되는 개념, 갈등하는 요소라고 여긴다.
이 전제가 옳은가?
여기에 처자식을 둔 아버지가 있다. 그는 세상의 불의와 폭력을, 그것이 자신을 괴롭게 하더라도 참고 견딘다.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는 법을 지켜야 한다.
그는 분노를 조절하며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맞게 행동한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감정 조절을 잘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사는 집에 강도가 들었다. 소리를 지르려는 처자식을 향해 강도가 칼을 휘두르려고 한다.
'감정 조절을 잘 하는' 아버지는 역시 참을 것인가? 이성적으로 법을 지키고, 친절하게 행동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강도를 향한 강한 적의를 느끼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충동적이다'고 말한다.
우리가 두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버지의 동기에 있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위해서 참았다. 처자식을 위해 참지 못했다. 처자식이라는 존재가 그를 이성적이게 만들고 감정적이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처자식을 '소중하다,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가치에 따라 다른 가치관이 자리를 잡고,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 드러나는 것이 정반대일지라도,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동기는 같다.
그렇다면 가치란 무엇일까? 이 글의 맥락에 맞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정도'
처자식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아버지에게 커다란 감정을 준다. 가정은 아버지의 최우선 가치이다.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가치관을 가정에 맞춘다. 돈 역시, 돈 자체보다는 돈으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것과 그것에 관련된 감정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 속에 깃든 가치관, 세계관 따위가 모두 감정의 영역이다.
이제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살펴보자. '이성적인 사고, 행위를 왜 하는가?' 이러한 물음을 하다보면 자기가 원하는 가치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과거에 그와 관련된 감정들이 원인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감정에 기반한 가치를 추구한다. 우리는 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머리를 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한다. 심지어 선호하는 사고의 방식도 결국 감정이 결정한다. 이성적인 사고의 시작부터, 방법 그리고 결과(답을 정해두고 생각하는 경우)까지 모두 감정 그 자체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이 감정의 영역에 속해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보였듯이, 이성과 감정의 경계는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인간만의 지성을 활용한 사고가 '이성'의 자격이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상식이나 느낌에 적절한 것만이 '이성적'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이성적'이라는 단어엔 긍정의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일상에서 '이성적이다.'는 굉장히 주관적인 판단기준이며,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좋아한다, 존경한다.'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만큼 '이성'이란 관념은 허무한 것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왜 이성에 집착하는가? 왜 이성을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이성과 동일시하는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인본주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가는 세상이다. 인간은 동물과 분명히 다르며, 그들과 구분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자부심과 믿음이 '이성'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거기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여기에 더해 스스로 독립적인 자아라는 믿음, 외부의 환경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판단한다는 믿음. 즉, 자유의지가 있다는 믿음 역시 이와 커다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감정vs이성'이 아니다.
'감정은 이성을 포함한다.'가 맞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감정을 지배하는 존재일까?'
이것은 애초에 이상한 질문이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엔 질문을 달리해야 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전제 하에)
순간적인 충동은 무엇인가?
어떤 메커니즘을 지니는가?
현실에서 어떻게 그것을 이용하거나 대비할 것인가?
(주절주절)
'뇌피셜'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을 사실이나 검증된 것인 양 말하는 행위(from. 나무위키)
위의 글은 말 그대로 뇌피셜이다. 쓰고 보니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글을 쓰면서 온갖 잡다한 주장들을 가져다 놓았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 하나씩 차근차근 증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란 사람(게으른 사람). 글이 길어지는 것이 싫다(=귀찮다)는 이유로 여기서 글을 끊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거짓없이 솔직하게 썼다는 점이다.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담았으며, 그것이 엉망진창이지만 당당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