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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y 24. 2024

우리나라 의료의 뉴노멀

2025년 의대 정원이 확정되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것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정부가 작정하고 덤비는데 한 직역단체가 이겨낼 재간이 있을까. 의약분업 때는 대학병원뿐만 아니라 개원의까지 나서서 투쟁을 했는데도 결국 관철되지 않았던가. 전공의와 의과대학 학생들이 아무리 들고일어난들 정부가 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다. 전공의들의 사직, 학생들의 휴학은 대통령이 '하겠다는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먹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싸움이라면, 졌다. 더 말할 것도 없다.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의 의료에 적응해 나가려면.


'앞으로의 의료'는 과연 어떻게 될까. 나는 그렇게 인사이트가 깊은 사람은 아니라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이야기해 주지는 못하겠다. 그런 예측은 유튜브에 이미 널리고 널렸으니 조금만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런 조금의 관심과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의사 - 돈 많음 - 기득권 - 혼내 주자'의 공식은 원체 흔들림 없이 견고해서, 의새 나부랭이들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들어도 먹히지 않는다. 하긴, 사람들이 전부 이성적이라면 애초에 저런 공식 따위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테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무슨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요는, 의사 증원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은 이민을 가지 않는 한 의료의 '뉴노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국민들이 누려 왔던 세계 최고의 의료, 젊은 의사들을 갈아 넣어서 기형적으로 유지되었던 작금의 의료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 판을 짜게 되었으니, 과연 그것이 정부의 주장대로 필수 의료, 지방 의료를 살리는 길이 될지는 직접 경험해 보시면 알게 될 일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기억해 달라. 2024년 의사직을 걸고 투쟁했던 전공의들은, 미래를 걸고 휴학을 불사했던 의대생들은, 그것이 절대 바람직하지는 않은 방향이라고 주장했었다는 사실을. 


한동안 SNS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전공의들을, 학생들을, 피 같은 내 새끼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교수로서 투쟁에 앞장서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였다. 의대 교수들이 한마음으로 투쟁에 동참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직'쇼'를 할 것이 아니라, 전공의들처럼 교수들도 정말로 병원 진료를 중단하고 의료를 실.제.로. 마비시켰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소심한 쫄보라서 블러핑 이상의 그 무엇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도 비대위에 사직서를 던졌었지만 나를 비롯한 상당수 의대 교수님들의 '사직'이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블러핑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과연 정부에서 모르고 있었을까. (실제로 사직하신 교수님들께, 그분들의 강단과 결단력에 깊은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 


사직 운운하는 의대 교수들 싹 다 잘라버리라는, 교수 하려는 사람 널리고 널렸다는 댓글들을 종종 읽게 되는데, 사실이 아니다. 대학에서 나가기만 해도 최소 1.5~2배 이상의 수익이 보장되는데 누가 미쳤다고 대학에 남아 있을까?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그만두면 내 밑에서 일하는 후배 교수가 옳다구나 하고 내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나 하나 믿고 대학에서 버티고 있고, 혹시나 내가 서울로 이직하게 되면 자기도 손잡고 같이 그만둘 거라고 했던, 그 후배 교수가? 나는 당장 내 눈앞에 있는 환자를 보는 사람이지 우리나라 의료의 미래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수술을 기다리는 대장암 환자들을 외면하고 우리나라 의료의 미래를 위해 병원을 박차고 나갈 수 있을 만큼의 큰 사람은 못 된다. (그래, 씹선비라고 욕해도 좋다.)


블러핑은 통하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뉴노멀의 시대로 한발짝 내디뎠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겪어 보아야 알겠지만, 나는 지금 당장 넉 달이 밀려 있는 내 환자들의 수술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넉 달이 여덟 달이 되고 열두 달이 되더라도, 견디시라. 그것이 이 정부가, 여러분들이 선택한 뉴노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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