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허송세월>
김훈 작가의 신작 산문집이다. 신작이라기에도 뭐한 것이 이미 출간된 지 일 년이 넘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김훈은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 문학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이고, 내가 정말 닮고 싶은 문장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문장들에서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신작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일 년 동안 읽지 않고 미루어 두었던 것은 그런 이질감에서 온 망설임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펼쳐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문장이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이질감의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남의 집에 저녁 마실 온 듯이 문상 왔던 사람들이 몇 달 후에 영정 속에 들어가서 절을 받고 있다.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허송세월>에서 작가는 나이듦을 이야기한다. 단문 위주임에도 술술 읽히지 않아 곱씹게 되는 문장들은 여전히 날카롭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세월은 여유와 관조보다는 독선에 가깝게 느껴져 읽는 내내 불편했다. 아래는 그 불편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식물의 내부에 어떤 추동과 지향성이 작동하고 있어서 꽃들은 그토록 여러 색깔과 형태로 피어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의 언어를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 꽃을 저러한 색으로 피어나게 하는 내적 필연성에 관하여 식물 종자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꽃의 종자 안에 그러한 '형질'이 들어 있고 그 형질이 유전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학문적 용어를 써 가며 길게 설명했는데, 그 말을 요약하자면 꽃은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설명의 빈곤함을 나무랄 생각이 없다. 그 친구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보여 주었다. 말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 인간은 동어반복을 거듭하면서 말이 많아지는데, 결국은 막다른 그곳에 갇힌다."
아, 그동안 김훈 작가에게서 느껴졌던 묘한 이질감의 근원이 이것이었구나. 48년생 작가와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 전문가의 과학적 설명을 이해하려는 의지 부족을 인간 언어의 한계라고 포장해 버리는 나이 든 작가의 꼬장꼬장한 아집. <허송세월>에서는 그간 작가의 문장에서 느껴왔던 묘한 이질감이 극대화되어 있었고, 나는 결국 페이지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하지 못했다. 나는 내 고통이 어느 눈금에 해당하는지 계량할 수가 없었다. 눈금을 들여다보니까 지나간 고통이 다시 살아나고, 닥쳐올 고통이 미리 와서 눈금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은 시간 속으로 광역화되었다. 나는 다만 현재의 고통만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미래의 고통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통은 경험될 뿐 말하여질 수는 없었고 눈금으로 표시할 수도 없었다. 고통을 시간과 분리해서 객관화할 수가 없었다."
VAS(visual analogue scale) score라는 것이 있다. 환자에게 10cm짜리 자를 보여 주고 본인이 느끼는 통증의 정도를 자에 표시하도록 해서 그 정도를 0에서 10까지의 점수로 환산하는 것이다. 주관적이기는 하나 간단하고 민감도가 높아 신빙성 있는 도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김훈 작가는 0에서 10까지 중에서 본인의 통증의 정도를 말해 달라는 간단한 요구조차도 그것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느냐는 논리로 거부해 버린다. 주관적인 증상을 객관화하려는 의학적인 도구에 불과함에도 그것을 철학적인 영역으로 끌고 가서 굳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한다. 통증 정도를 수치화해 달라는 요구조차 거부하는 환자가 의사의 다른 지시들 역시 잘 따를 리가 없다. 치료는 의사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의사의 역할보다는 오히려 환자 본인의 협조와 의지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아집으로 똘똘 뭉쳐 의사가 뭐라고 하든 듣지 않는 환자가 가장 다루기 힘들고 치료 성적도 나쁘다.
참 좋아하는 작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