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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Oct 02. 2023

바이탈의 전장에서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아직 채 준비 못한 강의와 밀린 학회 일들이 쌓여 있지만 이번 연휴는 그냥 쉬기로 했다. 나도 좀 쉬어야 또 일을 할 것 아닌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한동안 글이 뜸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바빠서'였지만 사실은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논쟁을 즐기지 않는 타고난 천성 탓에 논쟁거리가 될 만한 글은 가능하면 피하려 노력하는데 의료계에 굵직한 사건들이 워낙 많이 터지다 보니 그것들을 전부 외면하고 환자 이야기나 한가롭게 끄적이고 있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가 않아서였다. 코일색전술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설명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상을 해야 하고, 유착으로 인한 장폐색에 대해서 보존적 치료를 하다가 수술 타이밍이 늦었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하며, 치루 환자의 상부위장관 출혈을 제때 잡아내지 못하면 법정구속된다. 급기야 수술실 CCTV가 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걸까.


나는 의사 면허를 딴 이후 매 순간 환자를 최우선으로 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와 번갈아 당직을 서던 교수님께서 연수를 가셨을 때 일 년 365일 응급 콜을 혼자 다 받으면서 버텼던 것도 내가 하지 않으면 적절한 시기에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환자가 최우선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피할 수 없었던 합병증을, 어쩔 도리가 없었던 환자의 죽음을 의사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에서 바이탈과 의사들이 설 자리는 없다. 내가 바이탈의 최전선에서 십수 년을 보내면서도 지금까지 소송 한 번 걸리지 않은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였다. 언제 누가 나를 향해서 칼을 겨누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아무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 바이탈의 전장 속으로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배운 것이 이것뿐이고 내 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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