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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미녀 Aug 28. 2022

행운과 불운은 한 끗 차이

그림책 <행운을 찾아서>

<행운을 찾아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스스로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한다. 인터넷 백과나 이미지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카이로스는 앞 머리는 약간 있지만 뒷머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는 머리를 낚아챌 수 있지만, 지나가는 그를 붙잡진 못한다고 말이다. 준비된 자 운운하는 것은 나의 평 소지론이었다.  

    

 행운은 어떤가? 행운은 능력이나 재능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기회와는 또 결이 다른, 우연성이 있다. 신문한 칸을 차지하는 로또 당첨자의 일이나 코인이나 주식으로, 아님 부동산으로 대박을 쳤던 사람들 모두를 행운의 범주에 넣는다면, 행운은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르히오 라이를 라가 글을 쓰고 ,아나 G.라르티테가 그림을 그린 <행운을 찾아서>는 제목만 보고는 읽지 않을 책이다. 행운을 찾는다는 건 나에게는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찾아내는 것처럼 실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굳이 찾고 싶지 않은.     

 

이 책은 행운 씨와 불운 씨라는 두 사람이 휴가를 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시작한다. “가끔 순한 바람이 불곤 합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가야 할 때지요.”행운 씨의 휴가는 그렇게 시작한다, “가끔 반대로 바람이 불곤 합니다. 그럴 때면 지나치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불운 씨의 여행은 직장을 잃고 세레레 섬의 광고지를 발견하면서 불쑥 휴가를 가겠다고 결심한다. 주인공들의 이름만 보아도 그들의 여행의 예상되며, 한때 유행했던 ‘샐리의 법칙’과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게 한다. 우연한 행운의 연속과 우연한 불운의 연속.     

주변 사람으로부터 늘 낙천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나에게는 솔직히 불운 씨의 모습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바꾸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버스회사나 남의 탓을 하느니....’라는 마음이 든다. 스스로 준비된 사람이고자 나름의 분투를 해 왔다는 생각을, 아니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불운 씨 같은 사람은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매사 부정적인.   

   

그런데 그게 아들이라면....

“엄마는 네가 만약 아들이 아니고 회사 동료라면 너 같은 동료랑은 일을 하지 않을 거 같아.”

“세상에 이겨낼 수 없는 일은 없어.”

“왜 힘들다고만 하는 거야.”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데, 넌 준비도 안 하면서 왜 그렇게 변명을 하는 거야?”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반에서 회장, 부회장을 뽑는데 적잖이 기대감을 가지고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이번 주에 회장, 부회장 선거를 하는데, 나갈 거지?”

“아니. 내가 왜?”

라는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히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하기도 어려운데, 초등학생 때는 경험상으로도 나가야 하는 게 아닌 게 하는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아들과의 한랭전선은 바깥의 계절과 상관없이 늘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 주변의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를 하고 오면 더 진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부모가 말하는 데로 잘 듣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더욱더 움츠러들게 했다. 아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고, 우리는 각자 외계어로 끊임없이 아님, 나 혼자만 떠드는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나는 스스로 불운한, 불행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2시간인 직장에 출근하면서 매일 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저녁까지 미리 해놓았던 노력. 아이에게 좋다는 것은 다 해주고 싶어 시간과 정성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는 안도는 깡그리 사라졌다. 이제껏 평생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낙천적인 모습을 낱낱이 부수는 아들의 힘.     


“엄마는 책 읽는다는 사람이 왜 그래?”(뭘 말인가? 책 읽는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왜는 무엇인가?)

“넌 왜 그래? 매사 부정적이야? 세상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한동안 격렬했던 우리의 전쟁은 내가 이것저것 배우고, 일을 해서 바빠지면서 수그러들었다. 지금에서야 한 줄로 정리되지만, 그 시간은 길었다. 그중 타로카드를 배울 때가 생각난다. 타로카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의 스승일 수 있습니다”라는 선생님의 말은 늘 떠올린다.     

 

내가 늘 매사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아들을 둬서 불행하다고 느꼈던 시간 동안 아들은 어땠을까?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저런 부모를 두어서 불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몇 년이 흐른 후 그제야 아들의 마음을 살피게 되었다. 불운이나 불행에 우리는 격렬하게 저항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아들 또한 자신의 모습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이 그림책의 행운 씨와 불운 씨처럼. 그들은 같은 섬을 여행했고 매 순간 스쳐 지나갔다. 때론 불운해질 수도, 행운을 거머쥘 수도 있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는 떠나온 집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파랑새와 늘 함께 했지만 오랜 모험의 시간을 보낸 후 돌아와서야 파랑새를 발견한다. 불운 씨는 아직은 서툴기 때문에. 삶의 다른 즐거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온 행운을 몰라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불운 씨의 모습이 더 와닿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도. 아들이 지금은 고3, 군대를 가야 하는, 하고 싶은 것들을 아직 못 찾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막막한 상황이지만 언제든지 자신의 파랑새를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보고 싶다. 행운과 불운은 한 끗 차이니까. 뭐뭐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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