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화가」의 상징성과 고대 민간 사상
1. 들어가며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노란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널 바라보다 그만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네.”
<뜨거운 감자>의 노래 「고백」의 한 소절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고백하려는 한 남자의 수줍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남자의 손에는, 당연히 꽃이 한 송이 들려 있다. 그것이 프리지어인지 튤립인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가사에서는 노란 꽃이라고 단정을 지었지만, 빨간색이면 어떻고 또 파란색이면 어떠한가. 이성에게 꽃을 바치는 행위,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구애(求愛)의 행위가 또 어디 있을까. 이상한 일이다. 식물의 생식기관에 불과한 것인데 어느새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혹은 그 생식기관이라는 점이 그런 상징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인에게 꽃을 바치는 기사를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아보게 되는 것은, 그래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감정은 천년의 간극을 뛰어넘는 법이니까. 물론 통속적인 사랑은 아닌 까닭에,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상한 점은 얼마든지 있다. 꽃을 꺾어 바치는 인물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라는 점은 어떠한가. 꽃을 받는 인물이 유부녀라는 대목은 더 충격적이다. 심지어 이 할아버지는, 꽃을 바치며 노래까지 지어 바친다. 노래의 제목은 「헌화가(獻花歌)」. 『삼국유사』의 「기이(紀異)」편에 배경 설화와 함께 실려 있는 향가(鄕歌)이다. 이 로맨틱한 이야기는 과연 로맨틱하기만 할까? 노옹(老翁)이 부른 노래의 제목이 「고백」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 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한 번 살펴보자.
2. 살피며
2.1. 여간한 높이도 다 잊어버린
성덕왕 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지금의 명주溟州)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천 길이나 되는 높이에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歌詞도 지어 부인에게 함께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때 노인이 바친 「헌화가(獻花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줏빛 바위 가에
움켜쥔(오므린) 손[에서] 암소[를] 놓게 하시니(-거늘),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리이다.
배경 설화 그 자체에 주목하여 향가를 이해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면, 이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간의 로맨스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꽃을 꺾어달라는 말은 수로부인이 좌우의 시종들에게 한 말이지만,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노옹은 부인의 말을 새겨듣고 [聞婦人言], 그 말을 일종의 명령으로 인식하여 꽃을 꺾어 바치는 데 이른다. 미천한 신분임에도, 생계의 주요한 수단인 소의 고삐를 쥔 손까지 놓고서 꽃을 꺾어다 바치는 과감한 행동을 가능케 한 동인(動因)은 바로 수로 부인의 미모, 즉 아름다움이다. 이어지는 기록에 따르면, 수로 부인은 용모와 자색이 뛰어나 신물들이 여러 번 납치해갈만큼의 미인이다. 그녀가 아름다웠던 탓에 노인은 “애정의 서정시를 읊조리고 미녀의 요청에 봉사하는 기사로서 변모”하게 되며, 이는 나아가 “신라인의 미의식을 나타낸”(나정순, 『우리 고전 다시 쓰기 : 고전 시가의 현대적 계승과 변용』)다. 서정주 시인은 이러한 대목에 주목하여 「노인 헌화가」라는 시를 통해,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리고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린 노인은, 벼량의 높이뿐만 아니라 “여간한 높낮이도 다아 잊어버”린 존재라고 노래하기도 하였다.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이 노옹의 적극적인 행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아름다운 여성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신라인의 미의식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중년 남성이 걸그룹에 열광하고, 먼 세계의 어린아이들이 봉사단원들 중에서도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한, 비교적 서구형의 용모를 가진 단원에게 몰리는 것을 가지고 ‘미의식’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남의 아내에게, 그것도 고위 관료의 아내에게 치근대는 노인의 행동이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 안에서 실제로 벌어졌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그러한 까닭에 불가능한 사실을 현실화하려는 민중의 강렬한 요구가 「헌화가」를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학성, 『한국 고전시가의 연구』) 귀족부인이자 당대의 절세미인이었던 수로부인과 미천한 촌부와의 충격적이고 허구적인 로맨스를 생성해낸 것은 바로 민중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통해 집단의식을 표출해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설화를 두 남녀의 로맨스로 보는 견해는 소를 끌고 다니는 노인이 미천한 신분의 농민 계층이라는 점을 공통된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노인의 정체를 아무도 모른다는 구절[不知何許人]에 이르면, 그 전제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군다나 뒤이어 나오는 「해가(海歌)」와 관련된 설화에는 노인이 지혜를 발휘해 해룡으로부터 수로부인을 구해내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러한 점은 노옹을 단순히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미천한 신분의 범부라 보기 어렵게 한다.
또한 다수의 설화가 그러하듯 수로부인의 설화의 전면에 나타내고 있는 고도의 상징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설화의 사실(史實)은 향유층의 상상력에 의해 굴절/반영된 것이므로, 흔히 그 향유층의 인식과 형상화 작업에 의해 상징화/비유화되어 나타난다. 수로부인의 이야기를 기록한 일연은, 신이한 설화들을 그대로 제시하고 이를 실재했던 사실로서 파악하기보다는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징적인 의미는 설화를 향유하는 집단과 개인의 삶의 모습 및 당대의 시대상을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해결할 수 있다.
2.2. 선승(禪僧)은 암소의 고삐를 놓고
그렇다면 과연 수수께끼의 노인은 누구였을까?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저자가 승려 일연이었다는 점은 설화에 대한 불교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더군다나 노인은 소를 끌고 있지를 않던가. 소를 끌고 다니는 노인은 불가(佛家)에서 친숙한 존재다. 불가에서는 선승(禪僧)을 가리켜 목우자(牧牛子)라고도 하며, 그들이 수도하는 거처를 심우당(尋牛堂)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의 소(牛)를 먹이는 사람이요, 마음의 소를 찾는 집이란 뜻이다. 그 출신을 알 수 없어 신비로움을 더해 주는 노인은, 소를 끌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년간 잃었던 자기의 심우(心牛)를 붙들어 그 소의 고삐를 잡은 선승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이 그 손에서 암소를 놓겠다 말한다. 수로부인에게 줄 꽃을 꺾기 위함이다. 마음의 소를 먹이는 자가 그 고삐를 놓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계율의 파계, 미인을 앞에 두고 남성으로의 심적 동요를 일으킨 미흡한 수행의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떨기의 꽃과 그것을 원하는 한 여성이라는 애처로운 장면 앞에서, 다년간 수행의 결과를 한순간에 내어 버리면서까지 여인의 애원에 호응하였던 동정심 깊은 노인의 행동을 진솔한 인간성의 발로(發露)라고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러한 견해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노옹을 가리켜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숭고한 성(聖)의 정신적 소유자라고 칭송하고 있다.(김종우, 『鄕歌文學硏究』, 國語國文學叢書』)
“날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바치며 노옹은 노래한다. 비록 범계(犯戒)하고 말았지만 부인이 꽃을 받아 드는 순간 부끄러움은 사라질 것이며, 그 꽃을 매개로 완전한 일심으로서의 결합을 맺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노인의 마음은 미인에 대한 단순한 애정을 뛰어넘는, 전인류적인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화(化)할 수 있게 된다.
견우 노옹(牽牛老翁)의 모습은 비단 선승 뿐 아니라 도교적인 개념의 신선(神仙)이나 농경의례에 등장하는 농신(農神)의 개념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를 끌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설화 가운데서 불교적, 혹은 도교적 상관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는 이유로 불교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견해 역시 그 근거가 빈약하다. 『삼국유사』가 불교문화 중심으로 편찬된 것은 사실이나, 고기(古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함은 물론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발굴해 낸 민간전승의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도 주요 자료로 제시함으로써 종합 사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더군다나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며 「왕력」 편과 「기이」 편의 일반 역사를 앞에 두고 「흥법(興法)」 이하 불교 전반에 관한 내용을 일곱 편목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는데, <수로부인조>는 「기이」 편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불교 기사와의 관련은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겠다.
2.3. 노인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니
「헌화가」 설화의 배경은 성덕왕대(聖德王代)이다. 『삼국유사』에서 <수로부인조>는 성덕왕의 기사 바로 다음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일연이 기록한 성덕왕의 기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흉년과 구휼에 대한 기록이다.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동일한 해의 성덕왕의 기사를 살펴보니 역시 흉년이 들어 백성을 진휼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뭄과 흉년에 대한 기사가 여러 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4년 (중략) 여름 5월에 가물었다. (중략) 겨울 10월에 나라 동쪽의 주(州)와 군(郡)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다녔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5년 봄 정월에 (중략) 나라 안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중략) 이 해에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6년 봄 정월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으므로 한 사람에게 하루 벼 3되씩을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 2월에 크게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8년 봄 3월에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가뭄에 대한 기사는 잠시 끊어졌다가 성덕왕 13년부터 다시 등장하는데, 특히 성덕왕 14년, 15년에는 왕이 거사를 불러다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헌화가」의 배경 설화를 제의적 성격으로 해석하게 하는 주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다.
13년 여름에 가물었고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14년 (중략) 6월에 크게 가물어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못 가에서 비 내려주기를 빌게 하였더니, 곧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15년 (중략) 여름 6월에 가물었으므로 또 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비 내려주기를 빌도록 하니 비가 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가뭄의 기사가 거의 매해에 걸쳐 나타나고, 왕이 직접 주재자를 불러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14년과 15년의 기우제의 기사가 기록된 것은, 그것이 정례적인 것이 아니라 별제(別祭)로서 행하여진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취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사 이효의 출신지인 하서주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이다. 이는 <수로부인조>의 배경과 묘하게 겹친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순정공이 강릉의 태수로 부임하여 가는 길, 옆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닷가[海汀]에서 점심을 먹는 중[晝饍]이었다.
이는 뒤따라 나오는 「해가(海歌)」가 불러지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이틀째 길을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 중[晝膳]이었던 것이다. 암벽으로 둘러싸인 바닷가와 바다가 내려다보는 정자(臨海亭), 그리고 점심식사라는 시 ․ 공간적 배경은 이틀의 시간적 차이가 무색할 만큼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 또한 꽃을 얻지 못해 답답해하는 수로부인의 어려움을 노옹이 나타나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수로부인이 해룡에게 납치되자 또다시 노옹이 나타나 지혜로 부인을 구하였다는 「해가」의 배경 설화와 구조적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두 가지 유사한 사건의 반복은 동일한 의미의 어떤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바로 고도로 상징화된 가뭄과 관련된 제의(祭儀), 즉 기우제(祈雨祭)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김문태, 「<獻花歌>․<海歌>와 祭儀文脈」)
기우제는 유사함이 유사함을 낳는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 Homoeopathic Magic)의 방법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대인들이 소형 신상을 강에 흘려보낸다던가, 처녀를 발가벗겨 물을 뿌린다거나, 돌에 물을 묻히거나 물속에 담그는 식으로 비 오는 소리와 모습을 흉내 내었던 것은 그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등지에서는 여기에 음양(陰陽)의 원리가 첨가되곤 하는데,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드는 것은 이러한 음양의 조화가 깨진 까닭이라는 것이다. 하늘(天), 산(山), 남성성(男)은 양(陽)을 상징하며, 땅(地), 물(川), 여성성(女)은 음(陰)을 상징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구도는 「헌화가」에서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가뭄은 양이 극성하여 음이 없어진 결과이므로 음과 양이 다시금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여인이 사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수로부인은, 가뭄을 해갈하고자 파견된 여무(女巫)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며, 바닷가에서 두 번에 걸친 점심식사는 그녀가 주관하는 제의로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런데 제사를 진행하는 중 수로부인이 어려움에 봉착한다. 붉은 철쭉꽃이 필요했던 것이다. 철쭉꽃은 ‘양의 정령(精靈)’을 상징하는 것으로 수로부인의 여성성과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제물(祭物)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제물의 부재로 제의가 어려움에 봉착하자, 암소를 끌고 노인이 등장한다.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이 노인은, 중앙에서 파견된 대무당(大巫堂)이자 기우제의 주관자인 수로부인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나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기우제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노인은 아마도 그 지역의 토박이로서 기우제의 완성을 돕는 소무당(小巫堂)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었던 까닭에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다고 전해진다. 신물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것은 곧 접신(接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로부인이 샤먼임을 의미한다는 또 다른 강력한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3. 나오며
「헌화가」라는, 짤막한 4구체 향가와 그 배경 설화에 이토록 다양한 갈래의 해석이 가능한 것은, 우리 고대 사회가 가졌던 사상체계의 특수성 때문이다. 토착 신앙인 사머니즘의 토대 위에 그 시대적 필요에 의해 불교, 유교 등의 외래 사상이 수용되었고, 이들은 서로 갈등과 마찰을 빚으며 교묘히 융화되어 기층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신라 시조의 탄강지인 나흘에 신궁이 설치된 것은 소지왕 9년(487)의 일, 천지신(天地神)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는 중앙 통치력 확대 과정의 일환으로써 국가체제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었다. 불교의 공인이 이루어진 것은 법흥왕 15년(528)이었다. 왕실은 진종설(眞種說)과 왕즉불 사상(王卽佛思想)을 통해 왕권의 신성화를 표방함으로써 왕권 의식 고양과 귀족세력과의 차별화를 도모하였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가고 불교 세력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지배 이념의 변화일 뿐 사회사상의 측면은 그렇지 않았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대부분 기존의 토착신앙을 중요시하였으며, 또한 불교 자체도 토착신앙과 융화되어 토착화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비형랑의 설화에서 민으로 상징되는 귀신들이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흩어지는 것은, 지배층이 수용한 불교와 긴장관계에 있던 토착신앙상의 존재로서 당시 민의 사상 관념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동아시아 국제전을 거친 신라 중대 왕권은 이후 유학으로 상징되는 문물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왕권 강화를 위해 유가의 학설에 의지하기도 하였다. 중앙집권적 체제를 위해 불교보다 현실적인 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수로부인조>의 배경이었던 성덕왕의 통치도 이와 같은 시기였다. 그렇다고 왕실에서 이루어지는 천지신 숭배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조묘는 오묘로, 또 신궁으로 사직단으로 변화해 나가며 시조묘와 신궁에 대한 제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새로운 사상 수용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왕실이 이러한데 민중이 토착신앙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지신과 산천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지독한 가뭄에 왕이 직접 주재자를 불러 기우제를 지내도록 지시하는 것은 당대의 관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꼭 단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남녀상열지사면 어떠하고 숭고한 인류애면 또 어떠한가. 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불렀을 이런 종류의 노래들은 얼마든지 다양한 의미로 고찰하고 열린 가능성으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순정공의 경우는 어떠한가. 수로의 남편으로, 가부장이면서 동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최고 권력자이기도 하다. 당대 왕실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학적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히 주인공이어야 할 그의 역할은, 그러나 너무도 미미하다. 아무리 노인이라지만 외간 남자가 제 부인에게 꽃을 주며 노래를 부르는데 뒷짐 지고서 구경만 하고 있고, 제 부인이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넘어지며 발만 동동 구른다. 비범한 노옹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루며, 무능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혹 당대인의 유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에 대한 민간에서의 일반적인 관념이 이러하지는 않았을까. 수로부인은 또 어떠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백치미까지도 철철 넘친다. 천 길 낭떠러지의 꽃을 꺾어 달라 생떼를 쓰지를 않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와서는 놀란 남편이 심장을 쓸어내리며 괜찮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음식이 달고 맛있었다고 대답하는 인물이다. 여사제는 고사하고, 단순히 조금 아름답고 멍청한 위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이뿐이랴, 누구도 이끌어내지 못한 상징들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간추려내며, 일연은 퍽이나 재미있어하였을 것 같다. 닿을 수 없는 시간만큼이나 무궁무진한 세계가 아닌가. 지금의 우리는, 또 어떠한 사고 아래서 어떠한 일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또 다른 천 년이 지난 후에 어떤 의미로 비칠까. 자못 궁금하면서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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