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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Dec 13. 2022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

서점과, 도서관과, 살곶이 다리.

서점에서, 이야기 하나.


  아내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돌아볼 것도 없이 문학 코너, 그중에서도 한국 소설 매대를 기웃댔다. 명색이 선생 노릇 하면서 '역사' 도서 구역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반가운 책이 하나 있었다.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젊은 작가'라는 단어가 가슴을 울리던 때가 있었다. 여러 모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젊은 작가를 널리 알리겠다'는 취지도, '등단한 지 10년 이내의 작가'라는 '젊음'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정의도, 손바닥만 한 책 크기도, 취지에 맞게 출간 후 1년 동안 '특별 보급가'로 구매할 수 있는 점도 좋았다. '오천 오백 원'이라는 가격은 학생 식당의 라면과 편의점의  크림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대학생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부릴 수 있는 사치의 범주에 속했다.(라면과 크림빵은 지금도 환장하는 것들이라, 딱히 주머니 사정 때문에 먹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인다.)


  문학계 돌아가는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젊은 작가'라고 해서 선정된 작가들이 생짜 신인은 아니었다.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도 아는 이름들ㅡ김중혁도 편혜영도 김애란도 손보미도 김금희도 장강명도 있었다. 아닌가? 젊은 작가상을  수상해서 유명해진 건가? 유명세가 젊은 작가상 수상에 보탬이 된 건가? 문외한이라 아는 바는 없지만, 어찌 되었건 그렇게 매년, 한 권씩 사 모은 것이 꽤 오래되었다. 2010년부터 한 권 씩 한 권 씩. 놀라지 마시라. 2010년이 젊은 작가상 1회 시상이었고 그 해부터 특별 보급가로 구입을 하였으니, 매해 개근을 해 온 셈이다. 올해 것의 책을 들어 뒷면을 살폈다. 책의 크기나 종이의 재질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특별 보급가'가 '칠천오백 원'이라 적혀 있었다. 13년 간 이천 원의 가격 인상이라. 1.36배의 물가상승은 같은 시기 평균적인 물가상승률을 아득히 뛰어넘지만 뭐 어쩌겠는가. 김밥 한 줄이 오천 원이 된 세상에서, 나는 인생의 삼분 지일을 <젊은 작가상> 수상작을 읽으며 살아온 것이다.


  단편이 갖는 매력이 있다. 나는 그것이 단편 특유의 답답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문체는 건조하고 전개는 빠르면서 결말은 열려 있는 경우가 많아서, 변기의 물을 내리는 순간에도 잔변이 남은 그런 기분이 들곤 한다.(내가 썼지만 구역질 나는 비유는 사과할 거리가 된다.) 많지 않은 문장 속에 다양한 변주를 담아내다 보니 한 번, 두 번, 세 번 읽을 때의 단상이 다르게 맺히는 것이다. 두 권의 단편집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절기에 충실하게도 서점에는 붉고도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카드가, 소용돌이치는 스노우볼이, 용도를 알 수 없는 스티커와 안마기와 전자제품 액세서리가 가득했다. 마치 큰 활자만큼이나 더 넓은 여백을 자랑하는 베스트셀러 코너의 책들과도 같았다.

 


도서관에서, 이야기 둘.


  그리고 오늘은 도서관이다. 비 오는 저녁, 어느 대학교의 중앙도서관.

  대학 시절의 나는 도서관을 좋아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를 떠올리며 잊기 어려운 추억의 장소를 꼽아보라면 새벽녘 입김처럼 두 개의 기억이 뿜어져 나온다. 눅눅한 장서의 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때우던 서가의 좁은 테이블이 하나, 덜컹이는 박자가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던 4호선 지하철의 구석진 자리가 또 하나다. 책을 보고 보고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논문을 쓰던 장소들. 도서관에 앉아 기억을 곱씹으니 그런 류가 떠오른 것뿐이다. 술집에 앉아서 야구를 보고 있노라면 또 다른 장면이 떠오르겠지, 아무렴.


  인문서적이 빽빽이 들어찬 서가에 발을 딛는 순간 추억의 그 냄새를 맡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서 풍기는 쿰쿰하고도 신비한 냄새. 많은 이를 거쳐간 손떼의 흔적에 잘못 만지면 병균이라도 옮을 것 같은 모양새지만, 그런 책들을 탁자 위 눈높이까지 쌓아 놓고 문장을 옮기노라면 설렘을 주체하기 어려웠었다. 서점 주인이나 도서관 사서가 평생의 직업으로 나쁘지 않겠다는 낭만은 그런 설렘의 연장이었다. 1학년 성적이 더 나빴다면 문헌정보학을 전공했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동전의 앞뒷면처럼 낭만의 뒷면은 비현실이라는 사실도 곧 알게 되었다. 마침내 선택한 전공도 낭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서점의 '역사' 매대에서와는 다르게 도서관에서는 '역사' 카테고리의 도서들을 먼저 살필 생각이었다. 헌데 도서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사회/역사 자료실에 들어가려면 인문 자료실로 입장하여 내부 계단을 이용해 층을 옮겨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800번대의 '문학'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800에서 900으로 넘어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이 도서관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책을 얼마만큼이나 소장하고 있나 살핀다는 핑계로 ㄱ... 김... 순서로 작가의 이름을 살피다가 그만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작가의 필모그래피에서 제목만 읽어 알고 있던, 작가의 작품을 거진 모두 소장하고 있는 내가 어떤 서점에서도 찾지 못했던 작가의 첫 장편작이, 그의 이름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얼른 빼들고 서가의 구석진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열람실의 칸막이 책상보다 서가 한 켠의 탁자에 앉기를 더욱 좋아했던 스무 살의 나처럼 누런 종이 위에 빼곡히 인쇄된 명조체의 글씨를 하나하나 새기며 읽어가기 시작했는데,


  지나치게 포스트 모던하다


  는 한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화려한 문장과 종잡을 수 없는 서사, 현학적인 수사들을 이겨내며(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는데, 그만 '도날드 덕'이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갑자기 웬 '도날드 덕'이냐고? 농담이 아니라 정말 소설의 한 장면이었다. 번역일로 먹고사는 주인공 무리의 사무실(자기들끼리는 연구소라고 하더라)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나가보니, '도날드 덕'이 나타나서 말을 걸어오는 시퀀스가 펼쳐진 것이다! 황당한 주인공이 '디즈니랜드가 망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하고 생각했다는 설명까지 부연되니, 빼도 박도 못하고 그 '도날드 덕'이 확실해졌다. 대학 시절 '문학 이론' 수업에서 "포스트모던은 도너츠입니다" 하고 발표하던 순간 조여들던 십이지장의 요동을 '도날드 덕'이 상기시키는 기분이었다.(-도너츠라니 이게 무슨 궤변이람. -가운데가 텅 비었잖아.) 긴 독재의 터널 끝에 마침내 맞이한 민주주의의 기쁨보다, 그 불완전성에 혼돈을 느껴야 했던 당대의 '시대정신' 같은 것을 막 느끼려는 찰나 등장한 '도날드' 덕분에 책장을 덮고 말았다. 생뚱맞게 기린도 나오고 코끼리도 나오고 하던 것이 또 마침 그때 '포스트모던'한 유행이기도 해서. "설마 그 책을 돈 주고 사 볼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던 작가의 자평을 떠올리며 역사 자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어진 책들의 향연. 한국사와 세계사, 고대사와 현대사를 잇는 단행본들이 빼곡했다. 걷고 걸어도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미로였다. 지식에 탐을 내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벅차오르던 감정이 있었다. 삶에 지쳐 글자가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 뿌리마저 죽지는 않았는지 메마르고 갈라진 대지를 뚫고 그것이 빼꼼 고개를 내미려 하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이야기 셋


  의미 없이 휴대폰 인터넷 창을 열었더니 랜덤으로 기사를 몇 개 올려주었다. 가끔, 아주 가끔 역사 관련 기사가 뜰 때가 있고, 또 가뭄에 콩 나듯 그것을 열어보았는데, 이번 경향신문 기사 제목은 "태종의 야사와 정사가 담긴 곳... 현존하는 조선 돌다리 중 가장 길고 야경이 볼만"이었다. 또 킬방원이 누구를 죽인 이야긴가 싶어 열어 보았다. 돌다리를 하나 소개하는 기사였다. 아, 한양으로 행차하던 아버지 이성계가 분에 겨워 왕이 된 아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던 그곳. 그래서 '살곶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의 유래를 유명한 야사와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음침하게 생긴 게 뭐 저런 다리가 있나 싶었다.

 


  계속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한양대 쪽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1971년 사진의 허허벌판은 공업단지로 변신하기 전의 성수동..." "한강과 중랑천 사이에 놓여 홍수가 나면 일시적으로 섬이 되었기 때문이 뚝섬이라 불렸다..." 응? 한양대? 성수동? 뚝섬? 놀란 이유가 있었다. 왜냐, 아무 것도 모르고 저 다리를 족히 4번은 지나다녔으니까.


  이사를 하며 미용실을 옮겨야 했다. 아내의 소개로 성수동에 있는 곳에 다니게 되었다. 차를 몰기에도 지하철을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라 생각해 낸 것이 자전거, 정확히는 '따릉이'였다. 지도를 살펴보았다. 중랑천을 따라 자전거도로를 달리면 30분이면 족히 도착할 만했다. 자전거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한참 가을볕이 따사로웠던 때였다. 햇빛도 바람도 적당했다. 사람도 많았다.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게이트볼을 하고 농구를 했다. 문제는 내 따릉이였다.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골랐는데, 적당히 괜찮지가 않았다. 기어와 상관 없이 패달이 헛돌았다. 사이클 부대가 나를 비웃듯 스쳐지나갔다. 허벅지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여유롭게 밟는 어느 할아버지의 자전거에도 추월을 당했다. 당장이라도 반납을 하고 싶었는데, 따릉이 대여소를 찾으려면 중랑천변을 한참 벗어나야 했다. 따사로운 볕은 이내 신경질적으로 목덜미를 내리 쬐었다. 그리고 지친 내 앞에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성수동, 서울숲 방면은 저 넓은 중랑천의 건너편이었다.


  한참을 가도 다리가 없었다. 차들이 다니는 다리로 가려면 둑방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 같은데, 초행길이라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지치고 짜증이 올라온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살곶이 다리였다.


  특이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리가 한참을 이어져 중랑천을 가로지르는데, 긴 긴 다리에 난간이 하나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아래로 빠지기라도 하면 꽤나 우스운 꼴이겠군, 하고 생각했다. 큰 돌과 돌을 이어 놓은 바닥면이 심히도 울퉁불퉁했다. 굴곡을 따라 자전거 바퀴가 통통 튀었다. 덕분에 안장에 댄 엉덩이도 함께 튀었다. 골이 울리는 승차감이었다. 몽골에서 말을 탈 때 이런 느낌이었던가. 계속 엉덩이를 향해 달려드는 자전거 안장 덕분에 내려서 끌고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다리가 너무 길었다. 무엇보다 통통 튀는 자전거가 꽤나 재미있었다. 물론 크게 튀어 난간도 없는 다리 옆으로 추락한다면 더 이상 재미있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렇게 오며 가며 건넜던 다리가 바로 태종이 짓게 했다던 살곶이 다리였는 줄은 몰랐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 태종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그렇게 존재하지 못할 뻔 하다가 성종 대에서야 비로소 완성된 다리.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나 보다. 옛날 그의 이야기일 수도, 그날의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 다시 만날 때는, 조금 더 예우를 갖추어 대하게 되려나. 오래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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