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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Dec 21. 2022

찰스 다윈의 야채곱창

쉽게 쓰인 이야기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지친 아내는 잠들었을 텐데,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무어라도 사가면 좋을 거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마침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운동하러 늘 지나다니던 좁은 골목이었다. 분식집과 미용실과 반찬가게와 생선가게와 지하의 댄스교습소가 복잡한 기계장치처럼 얽힌 골목에 야채곱창집이 하나 있었다. 작은 가게였다. 매번 지나가면서도 저런 것이 있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길가까지 좌판을 늘어놓은 반찬가게 덕에 구석에 콕 박혀 있는 느낌까지 드는 그런 집이었다.


  결혼 전에 아내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야채곱창집에 두어 번 가서 잘 먹은 기억이 있었다. 적당히 포장해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먼저 꺼내 들었다. 실패하기는 싫어서. 어느 때부턴가 생긴 버릇이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처지이지 않을까 싶다.


  지도 어플에서 가게를 검색하고 후기를 찾았다. 곱창이 어쩜 이렇게 냄새가 안나죠. 볶음밥도 미쳤어요. 사장님도 친절하고 양도 많아요. 식어도 맛나요. 10월 15일. 또 다른 리뷰. 생긴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잡내도 없고 씹으면 고소한 맛에 자주 먹게 되네요 ㅎㅎ 곱창 손질에 신경을 많이 쓰시나 봐요. 인근 야채곱창 중 맛도 양도 정말 최고입니다 11월 24일. 더 볼 게 없었다. "영업합니다" 표지판이 걸린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작았다.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놓인 테이블이 딱 두 개 있었다. '1인분 포장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스캔한 문구에 힘을 입어 주문을 했다. "야채곱창 1인분, 양념막창 1인분 포장되나요?"


  사장은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분이었다. 마른 체구에 안경을 썼다. 검은 두건과 검은 앞치마, 검은 라텍스 장갑을 완벽하게 착용한 모습이 만반의 전쟁 준비를 마친 기사처럼 보였다. 흔쾌히 알겠다고 하더니 바로 조리에 들어갔다. 냉동고를 열고 미리 소분해 놓은 재료를 철판에 쏟아낸다. 열기가 단백질을 녹이는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다. 


  입구에서 가까운 쪽 테이블에 앉았다. 젊은 사장님이 작업하는 뒷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식당의 테이블 위에는 휴대폰 충전 단자가 기기 종류별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오기 전 지금 철판 앞에 서 있는 저분이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으리라. 손가락 두세 마디는 되는 두께의 책은 완역본, 정본인 듯해 보였다. 표지의 찰스 다윈이 근엄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책장을 넘겨보고픈 충동이 잠시 일었다.


  사장은 기계처럼 움직이며 순차적으로 조리를 진행했다. 인테리어랄 게 없는 가게 내부보다 주방이 훨씬 깔끔해 보였다. 재료를 익히고 소스를 붓고 포장을 하고 철판을 긁어내고 닦고 다시 재료를 익혔다. 군더더기 없는 작업이 보기에 좋았다. <종의 기원>을 읽는 사장이 만든 곱창 볶음이 마무리되어갈 즈음이었다. 중년 남성 하나가 조금 전의 나처럼 가게 문을 조심히 밀고 들아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홀로 열심히 작업하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소심한 세 남자가 좁은 가게에 있었다.


  사장은 포장을 위해 철판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새로 들어온 손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단골인 모양. 아저씨가 주문을 했다.

  - 야채곱창 1인분 주세요.

  - 항상 이것만 드시네요. 양념이 있는 다른 건 안 드셔보세요? 그것도 맛있는데.

  - 아, 제가 매운 걸 못 먹어서요.

  - 저희 곱창은 그렇게 맵지 않거든요.

  - ... 저한테는 맵더라고요.

  - 아, 매운 걸 전혀 못 드시는구나.

  그렇게 대화는 멈추었고 사장은 다시 곱창을 철판에 쏟았다. 아저씨의 주말 안주거리가 구워지고 있었다. 포장을 마친 내 곱창도 나왔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식을 새라 곱창을 최대한 가슴 쪽에 끌어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곱창은 맛있었다. 냄새가 안 나네. 자다 일어난 아내도 맛있게 잘 먹었다. 후기대로 양도 많았다. 이렇게 퍼주면 뭐가 남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곱창을 먹으며 나는 <종의 기원>을 떠올렸다. 인간의 진화와 곱창을 먹는 인간과 홀로 가게에 앉아 종의 기원을 읽은 사장과 같은 것들. 복잡한 골목을 지나다닐 때면 자꾸 가게 안을 슬쩍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가게에서 음식을 먹는 손님의 무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사장은 혼자였다. 재료를 준비하거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가게가 오래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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