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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ul 20. 2022

사람 구실

1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솜털 하나까지가 유쾌하오.


2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할까 꿈속에서 꿈임을 인지하였을 때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지 꿈임을 알았으나 눈을 뜨지 않고 있음은 그것이 불세출의 명작이 되리라는 흥분 때문인데 점입가경 흘러가는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지 못할 천재성의 발현 무의식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뜬다 반드시 뜬다 성공이다 그렇게 믿으며 하나의 상징도 하나의 흐름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 꿈을 꿈의 내용을 복기하고 또 되짚어 외우려고 애를 쓰는데 누구나 그렇지 않던가 눈을 뜨고 나면 정작 아무것도 어떤 것도 남지 않아 텅 비어 버리고 흐릿한 기억의 단편들은 아무리 주워 모아도 이야기의 구성을 쌓아내지 못하고 흩어지는 모래성이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그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오늘 여기까지 왔는데


3

아침의 한산한 카페. 홀로 앉아 브런치를 즐기노라면 여유로운 인생을 즐기는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는 줄을 알았지. 흔하디흔한 백수의 차림이로구나. 급하게 나올 적에 키보드라도 챙겨 올 것을. 휴대전화 펼쳐 들고 한 자 한 자 엄지로 꾹꾹 눌러보니 머릿속의 문장은 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지는 속도를 여전히 엄지는 따라잡지 못하고. 그렇게 실종되는 문장은 옆 테이블의 흘러가는 대화, 드르륵 원두 갈리는 소리만큼이나 의미 없기만 한데. 삶은 변하고, 시간은 흘러 자라난 머리카락이 시야 절반을 덮으니 이제는 그것을 잘라낼 시간. 웃음과 웃음, 큰 웃음과 작은 웃음, 그사이에 피어나는 것은 액정의 불빛과 그것을 응시하는 흐리멍덩한 눈동자. 날은 덥고 할 일은 많으나 일정은 원하는 대로 잡히지 않는다ㅡ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나의 일.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주변을 통제하며 살아왔던가?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다. 점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것뿐인데. 그 시야마저도 점차로 짧아지는데. 그렇다면 이전에는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던가? 그조차도 기분 탓이라면 결론은 굴종과 종속의 굴레, 수많은 천재 속에 갇혀 살아온 모양새다. 그래도 이만하면 훌륭하지? 그래도 이만하면 잘 되었어.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야. 끊임없이 자위하면서.


그대는 그렇게 살았으나 나는 결코 그러지 않을래요. 하지만 거리 두기는 마침내 실패. 그들의 이유가 나의 이유가 되고, 그 말끝에서 맴돌던 떫음이 완벽히 이해되는 까닭은 내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글쎄요, 꼭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사람은 사는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가요? -그건 또 무어야. 그럴 것도 없으면서. 다만 생각하노니 지금은 평일 오전 열 시, 이들은 다들 무어길래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거지?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책을 읽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그릇이 쌓이고, 빨래가 쌓이고, 서류가 쌓이고, 사람이 쌓이고. 다시 그릇이 빨래가 서류가 사람이 쌓이고. 사람 구실 하기 참으로 힘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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