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와 동일성의 오류?
글을 도입부만 써 놓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이어 나가지를 못했다. 결국 새 영화가 OTT행이 되었으며, 소위 망했다는(…) 기사가 나올 때까지 완성을 못했다. 손해가 천 몇백억이네, 제작비를 너무 많이 들였네 하는 식의 뉴스는 어딘가 씁쓸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글쎄, 솔직히 엄청 성공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었지만. 처음 이 글도 호평을 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 되기를 바랐나 보다. 봉준호도 패틴슨도 참 좋아하는데.
나는 왜 나일까? 꽤 철학적인 질문이다.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가. 개인의 동일성 문제를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신체 이론'과 '영혼 이론', '심리 이론' 같은 것들이 있다. 먼저 신체이론은 가장 상식적인 판단이다. ‘나’라는 존재의 시공간적 연속성이 나의 신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재건한 노트르담 성당은 불타기 이전의 것과 동일한가? 재건한 숭례문은 어떠한가.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과거의 것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과 현대에 와서 새롭게 복원된 것은 아무래도 가치에 차등을 두게 되는 법이다. 외형의 변화라는 측면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가깝게는 성형수술이 있다. 그 이상으로 가면 아직은 현실에서보다는 공상과학 소설에서,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도다. <페이스 오프> 같은 영화나 히어로물의 로보캅, 사이보그 같은 캐릭터가 먼저 떠오른다. 불의의 사고로 모든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 존재는 그 이전과 이후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신체이론에 의하면 그 기준이 되는 육체가 달라졌으므로 둘은 다른 존재여야 한다. 카프카의 벌레,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조차 못 알아보지 않는가. 그렇다고 벌레가 된 잠자는 잠자가 아니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공간적 연속성'이라는 단서가 필요해진다. 신체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시공간적 연속성 아래 놓인다면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 이론이란 '영혼'의 존재를 설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잠자의 사례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육신은 달라졌더라도 영혼이 그대로기에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영혼은 '믿음'의 영역이 된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부분은 분명 있어서, 영혼이 바뀐다는 설정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사람과 동물 등 다양한 변주를 거치며 여러 창작물의 단골 소재가 되어 오고 있다.
심리 이론은 우리의 기억, 버릇, 느낌 등 뇌에 담겨 있는 정보에 주목한다. 대체될 수 있는 육체도 증명할 수 없는 영혼도 불완전한 설명이라면, 차라리 기억 등의 정보가 곧 동일성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정보라는 것 또한 ‘뇌‘라는 신체의 기능이기에, 신체 이론의 연장선으로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심리 이론에서는 뇌라는 신체 조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굴이 바뀌고 몸이 바뀌어도 그 사람을 연상케 하는 몸짓, 버릇, 말투와 같은 것들이 있는 법이다. 전혀 관련이 없는 남학생의 행동과 말투에서 십여 년 전 유명을 달리한 여자친구의 모습이 연상되기 시작한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이야기다. 아니, 이 영화는 전생 어쩌고에 해당되니 영혼 이론이라고 보아야 맞으려나. 뭐가 되었든 나를 나로 만드는 동일성의 문제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키17>도 동일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뻔한 복제인간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영화에서 설정한 복제는 꽤 꼼꼼하다. 죽는 순간의 기억까지 완벽히 복제가 된다. 그렇기에 번호를 붙여 계속 만들어지는 미키들은 신체이론으로도 심리이론으로도 완벽한 동일인이 될 수 있다. 죽음 이후에도 죽음의 기억까지 안고 삶이 지속되는 미키는 그래서 ‘죽지 않는 인간‘과 다름없다. 죽음의 기분을 결코 알 수 없는 일반인들이 미키에게 제일 궁금한 질문은 정해져 있다. “죽는 것은 어떤 느낌이야?” 디테일한 설정을 통해 복제인간과 동일성의 문제에 훌륭한 변주를 주었다고 생각한 찰나, 17과 18이 동시에 존재하는 되는 사고가 등장하고 비로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나는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17과 18은 전혀 다르다. 이전까지의 미키들에게서 성격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기 어려웠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반적으로 소심했던 이전의 미키들과 달리 18은 폭력적이고 저돌적이다. 갑자기 무언가에 꽂혀 독재자를 암살하러 가겠다는 무모함도 갖추었다. 18의 의외성을 통해 플롯이 진행된다. 18이 아니었더라면 이와 같은 이야기 전개는 없었을 것이다. 18이 주는 어감에서 감독은 미성년자가 성인이 되는 숫자까지 연상해 내며 흐름의 변화를 긍정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미키들은 동일한 DNA에 동일한 기억을 가졌다. 그렇다면 성격도 동일해야 한다. 사람이 참 바뀌지를 않는구나, 생각할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고 다른 경험을 쌓으며 스스로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기가 막히게 과거와 똑같은 언행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생경한 순간이 있다. 나쁘게 보면 발전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그게 나의 동일성이자 아이덴티티가 된다. 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 그런데 17과 18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다르면 안 되는 그들이 달라졌다면, 그 이유가 영화적 장치로 충분히 설명되었어야 했다. 미키를 복제할 때 연구원이 실수하는 장면이 삽입되기는 했지만, 이는 18의 존재로는 이어지지 않는, 그저 맥거핀으로만 기능했다. 18은 왜 그렇게 달라졌는가? 왜 그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죽이려 드는 존재가 되었는가? 이 대목에서 핍진성의 결핍을 느끼고 나니, 18의 특이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후의 모든 사건의 흐름에 집중하기가 개인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러고는 어딘가 본 듯한 이야기들의 연속. 좋은 음식을 독차지한 우스꽝스러운 독재자, 소스에 환장한 권력 보조자, 방호복을 입고 감염원을 피하느라 허둥대는 공권력의 인간들, 인간처럼 블러핑 하는 크리쳐의 블랙코미디들은 다 어딘가 같은 감독의 작품에서 보았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설국열차에서, 괴물에서, 옥자에서, 기생충에서, 또는 살인의 추억에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주제 전달 방식이 이전의 작품보다 나은가, 하는 점 역시 역시 쉽게 답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저 그랬다. 패틴슨의 연기를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소소한 유머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터지는 웃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번역의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원래 사람을 웃기는 게 제일 힘든 법이다. 그래서 코미디언은 존경받아야 할 직업이다.) 영어로 대본을 쓰며 그 맛을 자아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랜만의 작품이었는데, 18이 아닌 비슷한 미키가 또 나와버렸다. 같은 성격의 17스러운 미키만 둘이라면,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끌고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