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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은 전쟁과 피를 먹고

아테네 민주정치가 자리하기까지

by 한겨울

서구 문명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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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은 두 기반 위에 이룩되었다. 하나는 헤브라이즘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은 상당히 감소하였다고 하지만, 크리스트교는 근대를 이루기까지 서구 문화와 사고의 뿌리이자 문명 자체였다.

또 하나의 기둥은 헬라즘이다. 헬레니즘으로 통용되는 이 용어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건설한 헬레니즘 제국만을 의미하는 것 아니다. 이전부터 그리스인들은 여러 도시국가(폴리스)를 건설하고 대립하고 번성하면서, 모두 같은 헬렌의 자손이라는 동족의식(헬레네스)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최고 산물은 단연 철학과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인의 철학은 크리스트교 교리의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서양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리고 민주정이 있다. 오늘날 정치 체제의 최종 지향점이 된 민주주의.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형태의 어떠한 영감을 제공한 것만은 분명하다.


헬레니즘은 유럽의 고향이자 자부심이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그러했고,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 지원의 당위를 설명하며 "그리스의 문제는 곧 유럽 전체의 문제"라고 했다. 퍼시 셀리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고도 했다. 낭만주의자들은 고전 그리스를 이상화하고 그로부터 유럽의 정신을 찾았다. 이들의 지나친 로맨티시즘적 열정이 그리스 독립 전쟁에 방해가 된 부분도 더러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는 유럽 열강의 지원 아래 독립에 성공했고, 이 성공사례와 함께 민족주의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민주정의 탄생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말은 오랜 시간 독재에 저항하며 젊은이들의 희생 위에 힘겹게 민주주의를 이룩한 우리에게 꽤 친숙한 격언이다. 세계 최초의 민주정 또한 피를 먹고 자랐다. 민주정은 전장에서 흘린 피로 인해 탄생했다.


아테네는 왕정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에게 좌우된 왕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고대 국가는 일정한 발전 단계를 거친다.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까지 작은 단위가 모여 큰 단위의 집단을 이루게 된다. 개별 가족으로 구성된 촌락공동체가 모여 씨족사회를 이루고 수장사회, 연맹왕국 등으로 통합해 나간다. 그렇기에 초창기 왕권 미약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귀족들은 자기 씨족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그들에게 추대된 왕은 강력한 힘을 갖지 못했다. 유명무실한 왕은 이내 사라지고, 아테네는 귀족정으로 운영된다. 왕은 9명의 아르콘(집정관)으로 대체되었다. 귀족들은 결정 사항을 민회에 통보하였다.

귀족정 아테네에 동요를 가져온 것은 식민운동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변화였다. 비와 물이 부족하여 곡물 재배가 적합하지 않은 그리스 지형은 이들을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해외 무역으로 부족한 식량과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마른 땅에서 잘 자라는 포도, 올리브로 만든 기름은 아테네의 자랑스러운 수출품이었다. 아테네산 직물과 도자기도 인기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상공업이 발달했다. 해상 무역과 상공업의 발달은 상인과 선박 소유자, 직물과 도자기 제조업자 등의 부와 힘을 증가시켰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차츰 평민들이 귀족의 권력 독점에 도전할 발판이 마련되고 있었다.


팔랑크스.png 그리스의 팔랑크스 (그림 출처:나무위키)

여기에 전술의 변화가 더해졌다. 중장보병(holite, 호플리테)의 밀집대(phalanx, 팔랑크스)가 전쟁을 수행했다. 청동 헬멧과 흉갑, 원형방패와 장창을 든 보병대가 말을 탄 귀족의 역할을 대신했다. 중무장의 비용은 각자의 부담이었다.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 이상의 유산 시민은 중무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라를 지켰고, 국가에 전쟁에서 흘린 피에 상응하는 권리를 요구했다.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Solon)은 계급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내길 원했다. 평민의 요구를 반영하여 기여도에 따라 시민을 귀족, 기사, 농민, 노동자의 4 계층으로 구분했다. 아르콘과 귀족회의(arepoagus)는 여전히 상위 두 계급만의 전유물이었지만, 최하층에게 민회에 참여할 권리를 주는 등 정치 참여의 길을 열어주었다.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도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던 그는 '조정자(調停者)'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불완전했다. 솔론의 중재를 귀족, 평민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부 갈등은 기원전 561년 빈농층의 지지를 받은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사병을 이용해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이 참주(僭主, tyrant)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를 견제하는 귀족 가문을 모두 추방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통치 수완도 좋았다. 은광 개발과 정복 활동으로 경제적 풍요를 이끌었다. 대중 현혹을 위한 선전 수단도 적극 동원했다. 신전을 세우고 종교 행사를 앞세워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아테네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2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통치력을 따라가지 못했던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참주정치는 끝이 났다. 민주정치 이행 과정에서 갈등을 활용하여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의 등장은 새삼 놀랍지 않은 일이다. 당장 한국의 현대사가 어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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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민주정 발전에 기여한 정치가.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아테네 민주정치의 시작을 연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는 부족제 개편을 통해 500인회라는 새로운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아테네 전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경제적 또는 직업적인 이해관계가 균등하게 혼합된 행정 단위로서 10개의 행정부족(tribe)을 조직하고, 추첨을 통해 부족마다 50명씩을 선출하여 500인회를 구성하였다. 500인회는 실질적인 통치 기관으로서 아테네의 재정, 전쟁, 외교 전반을 관장하였으며, 20세 이상의 시민권을 가진 모든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는 5백인회의 제안을 토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하였다. 사법권은 5백인회와 동일한 선출방식으로 구성되는 시민법정이 가졌다.

도편추방제(Ostracism)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작품인지도 확실치 않다.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편에 적게 하여, 그 수가 6,000개 이상에 달하면 해당 인물을 10년 간 국외로 추방토록 하는 제도였다. 참주정에서 교훈을 얻어 민주정치를 지키려는 제도였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후 아테네 몰락 과정에서는 정적 제거용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완벽한 시스템과 제도는 없다. 이를 운용하는 사람의 몫이 더 큰 법이다.



민주정의 완성


그리스 세계는 오리엔트를 통일한 당대 최강대국 페르시아에 지속적으로 도전했다. 다리우스 1세를 상대한 마라톤(Marathon) 평원의 전투(B.C.490)의 승리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대규모 침략으로 이어졌다. 영화 <300>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Thermopilae) 협곡의 전투(B.C.480)가 그 와중에 벌어졌다. 마라톤 전투에서는 중장보병 밀집대의 활약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강인한 훈련을 거친 스파르타 용사의 활약이 두드려졌다. 국왕 레오니다스(Leonidas)를 포함한 스파르타 용사 전원의 전사로까지 이어진 완강한 저항으로 시간을 번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아래 도시 아테네를 포기하고 살라미스로 철수, 적을 유도하여 해상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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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단노선(트리에레스, τριήρης, triērēs)은 아테네의 주력 군함이었다. 3단으로 배열된 노를 통해 빠른 기동성과 방향전환을 할 수 있었다. 당대의 해전 전술은 단순하다면 단순한 것이었는데, 함수의 청동 충각으로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거나, 충돌 상태에서 배 위의 중장보병이 적선으로 옮겨 타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페리플루스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빠른 기동력이 전술의 핵심이었고 기동력은 배 밑바닥에 들어가 노를 젓는 노잡이에게 달려 있었다. 배 한 척당 170명씩 배치된 노잡이 역할을 담당한 부류에는 노예, 외국인, 미성년층도 있었으나, 대개 아테네의 하층민이 담당했다. 스스로 갑주와 무기로 무장할 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하층민 테테스(thetes) 층 상당수가 건장한 맨몸으로 수병으로, 노잡이로 참전하여 살라미스 해전 승리라는 가장 결정적인 활약으로 나라를 구한 셈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거친 아테네의 민주정은 한층 더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부유한 평민에 더해 하층민의 피와 희생에도 국가가 보답할 차례였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5백인회를 대신해 민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귀족회의 아레오파구스회의를 대신해 10명의 장군이 최고 정무를 담당했다. 장군은 민회에서 매년 재선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이를 통해 30년 가까이 아테네를 이끌 권한을 얻었다. 장군들을 보좌하는 관리는 매년 추첨을 통해 임명되었다.


장군과 같은 소수의 전문직을 제외한 모든 공직이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아테네의 모든 성인 남성, 여성과 노예, 외국인을 제외한 모든 시민권자가 추첨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모든 계층이 공직의 대상이 되기 위하여서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했다. 본래 공직은 대가 없이 수행하는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생업에 바쁜 하층민들이 생계유지 수단을 내려놓고 보수 없이 공직을 수행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공직의 대가로 국가가 수당을 지급했다. 배심원과 5백인회 위원, 기타 공직자에게 보수를 지급했다. 후에는 민회 참석자와 연극 관람자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빈곤한 시민도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것이다. 국고에 의한 수당 지급, 철저한 추첨제, 1년 임기제가 직접 민주정치(direct democracy)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직접 민주정치 이상 실현을 위하여서는 수당 지급이 필수적이었고 보수를 지급하려면 재원을 마련해야 했다.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모두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시민권을 한정하도록 제한하였으나 수당은 더욱 확대되었다. 아테네는 해결책을 나라 밖에서 찾았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 세계의 구심점이 되었고 동맹시로부터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받았는데, 이것이 민주주의 운영을 위한 재원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더한 돈을 필요로 했다. 아테네는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섰고, 주변 폴리스를 압박하고 수탈했다. 아테네 중심의 동맹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로서 그리스 세계는 분열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으로 견고해진 그리스의 단합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깨져나갔다. 민주정치의 완성이 제국주의로 이어지며 평화의 균열과 아테네의 몰락, 민주정치의 붕괴로 이어지는 전개는 역사의 오묘한 역설이다. <계속>


<참고자료>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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