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흔적을 따라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혼자

홀로, 블라디보스토크⑩

by 한겨울
둘째 날 오후

[해양공원] ⇒ [요새 박물관] ⇒ [주마 레스토랑] ⇒ [이고르 체르니 고프스키 성당] ⇒ [혁명광장] ⇒ [사도 성 안드레아 소성당(영원의 불꽃)] ⇒ [니꼴라이 황태자 개선문] ⇒ [잠수함 박물관] ⇒ [굼 백화점] ⇒ [클레버 하우스] ⇒ [와인랩] ⇒ [아르바트 거리(숙소)]




요새 박물관


요새 박물관 내부의 모습. 사진 오른쪽이 보면 콘크리트 벙커가 줄지어 늘어 있다.(왼쪽) 요새 박물관에서 내려다본 전경. 해양공원을 비롯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오른쪽)


해양공원에서 계단을 따라 언덕을 한참 올라가면, 요새 박물관에 도달할 수 있다. 오전에 관람한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이 전형적인 박물관의 형태를 가졌다면, 이날 오후에 방문한 요새 박물관과 잠수함 박물관은 흔히 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요새 박물관은 전시에 실제 요새로 활용되던 곳이었다. 베지미안나야(Bezymyannaya) 요새라고 불렸던 이 곳은 19세기 말에 세워졌으며, 러일 전쟁에서도 재건축되어 활용되었다 한다. 극동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블라디보스토크가 갖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새의 구조 그대로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1996년의 일이었는데, 수많은 전시품들을 한 공간에 때려 박아 놓고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박물관들의 특징인가 싶을 만큼 볼거리가 많았다. 실외에는 미사일, 장갑차, 대포 등 다양한 무기가 배치되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인들이 근무하였을 콘크리트 벙커와 지하 통로는 각종 무기를 진열한 전쟁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박물관 외부의 여러 종류의 원거리 무기들.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척이나 즐거울 것 같다.


전쟁이나 무기 종류와 같은 것에 대한 관심도 적고 별반 배경지식도 갖추지 못한 데다, 으리으리한 무기들을 보아도 멋있다며 감탄하는 성정이 되지 못하는 자칭 평화주의자가 되다 보니,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다만 두꺼운 콘크리트 외벽으로 둘러친 벙커를 오가며 관람을 하는 일이, 마치 과거 요새를 지키던 군인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과거인의 삶에 다가가는 것은 어찌 되었든 흥미로운 일이었다.

벙커 내부의 박물관의 전시물. 벙커와 벙커 사이를 오가며 관람하는 것도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저렇게 많은 총기를 한꺼번에 볼 일이 또 있을까.




니콜라이 2세 개선문과 해군 잠수함 박물관



절대 권력에 대한 동경과 마지막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마지막 황제'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어딘가 미묘하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 니꼴라이 2세는 그런 감상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개인이자 인자하고 정 많은 아버지였지만 동시에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였다. 나라를 불안정과 전란의 소용돌이 밑바닥으로 침잠하게 만든 책임자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즉결 처형으로 일가족 전원이 사살되었던 비극적 최후를 무능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끔찍하다. 마지막 황제의 흔적이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남아 있음은 신기한 일.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색감의 건축물, 니꼴라이 2세 개선문이 그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그는 짜르의 자리에 오르기 전 황태자의 신분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방문하였다. 먼 곳까지 행차한 황태자를 기념하고자 아름다운 개선문도 세웠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별다른 후계 교육이나 준비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였다. 황제에 즉위하며 스스로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던 황태자에게는 나라의 경제난과 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적국 독일에서 시집 온 황후는 온 국민이 황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혈우병에 걸린 외아들을 고치기 위해 신뢰하였던 괴승 라스푸틴은 위태로운 러시아의 정치를 더욱 나락으로 이끌었다. 혁명이 발생했다. 황제는 퇴위당했으며, 정치적 이유로 급작스럽게 처형이 결정되었다. 집행인은 사형을 통보하고 곧바로 총을 난사하였다. 사형 선고를 들은 황제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뭐라고 하였는지 잘 듣지 못하였다.'


9천 킬로미터를 여행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황태자는 이 모든 사실들에 대해 어느 하나 짐작이나 하였을까? 아름다운 개선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황태자의 어리석은 기쁨이 전해져 오는 듯하여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니꼴라이 개선문에서 바다를 향해 남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잠수함 박물관이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함 10대를 침몰시키며 실제로 활약하였던 잠수함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개조해 놓은 것이었다. 140미터에 달하는 C-56 잠수함의 외관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내부에 입장하면 선실과 기관실 등 실제 잠수함의 구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된 자료에 대한 설명이 전부 키릴 문자로 쓰여 있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사진과 그림 등을 통해 잠수함의 구조에 대한 자료와, 실제 전쟁 시 작전 수행에서 이 잠수함이 세운 전과에 대한 설명들임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박물관의 내부. 잠수함의 공간을 활용하여 전시물을 구성해 놓았다.
잠수함의 구조와 잠수함이 세운 전공에 대한 설명
잠수함의 해치, 수많은 계기판과 손잡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 실제 잠수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잠수함이 이런 공간이구나, 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설물들이 그대로 보여서 좋았다. 선원들의 숙소가 되는 선실이나 계기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관실 등이 인상적이었다. 둥근 해치를 통해 실과 실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구간이 몇 있었는데, 등 뒤에는 가방을 메고, 두꺼운 겉옷을 입은 상태에서 몸을 굽혀 자그마한 원을 통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딘가에 혹이 날 만큼 세게 머리를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한 번쯤 경험해 보는 일이 나쁘지는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저녁의 일정은 쇼핑을 하는데 할애하였다. 기념품이 될 만한 마트료시카와 마그넷을 조금 구입하였고, 많은 이들이 선물로 추천하는 보습용 당근 크림도 몇 개 확보하였다. 제일 공을 들여 산 것은 1인당 1병까지 면세가 되는 벨루가 보드카로, 아버지에게 선물할 것이었다. 실제로 좋은 선물이 되기는 하였는데, 아무래도 병이다 보니 혹 깨지기라도 할까 싶어 옷가지로 여러 번 감싸 캐리어 안쪽에 깊숙이 넣는 등 힘겨운 과정을 거쳐 들여왔음에도, 술을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정작 한 방울도 맛보지 못했다. 도수 없는 맥주를 사서 숙소를 가지고 들어 온 것도 둘째 날 저녁의 쇼핑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셋째 날

[아르바트 거리(숙소 -> 해적 커피)] ⇒ [ХЛОПОК] ⇒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비로소 여행기를 마무리한다. 호흡이 길어지며 시간도 그만큼 많이 소요되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당당하게 내놓기에 부끄러움이 많이 드는 글이었다. 가장 자신이 없었음에도 가시적으로 또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난 글이 되기도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여행 중에, 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 나가며 여행기를 작성하였는데, 어떤 부분은 아예 새롭게 쓰이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여행에 대한 기억이 퍽 선명하여, 글을 쓰는 동안 몇 번을 놀랐다. 홀로 진행한 여정이어서 가능하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가 겪고 만나는 것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물론 기억 이상으로 기술 발전의 덕을 보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휴대폰으로 촬영한 사진에는, 그것을 찍은 시간과 위치에 대한 정보가 함께 담겨 있었다. 사진의 상세 정보를 조회하면, 사진이 찍힌 지점이 표시된 지도를 한눈에 볼 수도 있었다. 지도상에서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면, 정확한 거리와 경로, 도보 또는 대중교통으로 소요되는 시간까지 모두 정확하게 검색이 가능했다. 사진과 사진을 잇고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며 하나씩 조각을 맞추다 보니, 꼬리를 문 기억이 더욱 선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짧은 나날은 그렇게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사진 정보 상세 조회를 통해 확인한 휴대폰 캡처 화면. 사진이 찍힌 위치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어 좋았다.


어느 겨울 급작스럽게 진행한 나의 여행, 홀로 맞이 한 블라디보스토크. 부족한 준비로 인해 놓친 부분이 많았고, 지식과 열심의 부족으로, 직접 보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 상당하였다. 9편이나 되는 부족한 글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글을 쓰는 이나 읽는 이 모두, 언젠가 혼자 하는 여행에 또다시 도전하게 될 날들이 있을 것이다. 참고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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