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흔적을 따라 : 기차역 주변에서

홀로, 블라디보스토크⑨

by 한겨울
둘째 날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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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역


박물관을 빠져나와서는 남쪽으로 걸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 다음 목적지였다. 모스크바에서 시작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인 이곳은, 차갑고 청명한 하늘 아래 하얀 외벽이 대비되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공항처럼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진입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역사의 내부로는 굳이 들어가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러시아를 따돌리고 한반도를 독점하길 원했던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의 시점에 서둘러 러시아에 전쟁을 걸었다. 전쟁이 벌어진 극동 지역에 군수품과 지원병력을 신속히 보급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러시아는 전쟁의 와중에 부랴부랴 철도 연결을 임시로 마무리 지었다. 전쟁의 결과는 당시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것이었다. 육지에서는 서로 큰 피해를 주고받으며 비등하였으나,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일본에게 해전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결국 한국 문제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경쟁자를 모두 제쳐 내는 데 성공한 일본은 기어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는 절차에 돌입하였고 그 첫 단계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불법과 강제로 체결된 조약의 부당함에 항의하고자 대한제국의 황제는 비밀리에 특사 파견을 결정하였고, 황제의 명령을 받은 세 명의 젊은 특사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러시아가 일본을 막기 위해 부설했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났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철길 위에 서서 서쪽으로 출발하는 열차를 떠나보내는 것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할 그것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의 모습




연해주 국립 미술관


도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연해주 국립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국립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에 비해서는 아담한 규모였지만 그 어떤 장소보다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아르세니예프 박물관도 그랬고, 여기 국립 미술관에서도 그랬는데, 추운 겨울의 러시아에서는 건물의 출입구에서 외투를 보관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차곡차곡 걸어 정리하고, 옷걸이에 해당하는 번호표를 발급해준다. 입장객의 짐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아무래도 날씨가 날씨인 만큼 다들 부피가 크고 무거운 외투를 두르고 다니기 때문에, 실내 관람 시에 불편하지 않도록 외투를 벗어 두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였다. 그런데 여기 국립 미술관은 한술 더 떠서, 촌스러운 헝겊조각까지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이것의 용도를 몰라 잠시 헤매기도 하였는데, 이내 신발 위를 덮는 덧신임을 알 수 있었다. 미술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덧신의 착용이 필수적이었다. 눈과 얼음이 얼어붙은 도보 위를 걸어 다니다 보면 신발이 젖고 더러워지기가 쉬웠다. 공간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텐데, 덧신을 착용하고 보니 꼴이 퍽 우스웠다.


연해주 국립 미술관의 외관(왼쪽). 안에 들어가면 신발 덧신을 착용해야 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오른쪽)


미술관의 그림들 중에는 이반 아이바좁스키(1817~1900)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의 그림이 바다와 태양을, 그 사이를 유유히 항해하는 범선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었다.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파도와 구름과 바다 거품, 특히 빛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아르메니아인계 러시아인 화가였던 아이바좁스키는 생애의 대부분을 크림 반도에서 보냈으며, 절반 이상의 작품을 통해 바다 경치를 그려 내었다고 한다. 망망대해 위를 떠도는 배 한 척. 그림을 보니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그 가사를 읊조리며 그림을 감상하였다. 짧게나마 휴식을 갖는 기분이었다.


연해주 국립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그림들. 미술관의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성 소피아 대성당의 모습도 보인다.


난 또 어제처럼 넘실거리는 순풍에 돛을 올리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날 지켜주던 저 하늘의 별 벗 삼아서
나 또 홀로 외로이 키를 잡고 바다의 노랠부르며
끝없이 멀어지는 수평선 그 언젠가는 닿을 수 있단 믿음으로




율 브린너 생가


율 브리너(1920-1985)의 모습(사진 출처: 나무 위키)

미술관에서 나와 길 건너를 올려다보면, 허리춤에 손을 올린 당당한 동상이 하나 시야에 들어온다. 1950, 60년대 헐리우드를 주름잡았던 대배우 율 브리너의 동상이었다. 별다른 영화광은 아닌 까닭에, 그 옛날 영화에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는데, 이상하게도 율 브리너의 이름과 외모는 모습은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었다. 위엄이 넘치는 중후한 발성과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대머리. 성탄절 시즌이 오면 방송국에서는 <벤허>라던가 <쿼바디스> 같은 기독 명화들을 돌아가며 재방송해 주었는데, 어린 시절 나는 지루함을 참아가며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을 훌쩍 넘는 그런 영화들을 보곤 했었다. 출애굽기와 모세를 소재로 한 영화 <십계>에서의 람세스 2세는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주인공 모세에 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배우를 보며, 그 외모와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율 브리너.


영화 <십계>와 <왕과 나>에서의 율 브리너


지구 상의 대부분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던 제국주의 시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면한 국가는 태국이었다. 동남아의 좌우를 갈라 먹었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 지대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분명 운도 작용하였겠지만,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고자 애썼던 시암 왕국 국왕의 노력은 그들의 자립과 독립을 지켜내는 대외적인 명분으로 충분한 것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태국의 왕가가 그들의 국민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어 오는 원인을 제공했다. 태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는 라마 4세와 5세가 대표적인데, 히트한 뮤지컬이자 헐리우드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왕과 나>는 라마 4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뮤지컬과 영화 모두에서 라마 4세의 역할을 맡아 배우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율 브리너였다.


어린 시절 'EBS 주말의 명화'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얼핏 본 기억이 난다. 영국에서 온, 백인 여성 가정교사에게 감화되어 근대화 추진을 결심하고, 마침내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태국 국왕의 이야기. 왕과의 사랑 타령은 가정교사의 일방적인 주장인 데다, 불쑥 나타나는 폭군의 성정이 백인 여성에 의해 다듬어지는 부분은 역사 왜곡에 가깝고, 오리엔탈리즘으로 점철된 묘사도 많은 편으로 태국에서는 상영 금지당한 작품이다. 작품이 갖는 시대적 한계와는 별개로, 태국 왕으로 분한 율 브리너의 연기는 빛이 났고, 이 작품은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파라오에서 시암 왕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이었던 율 브리너가 유독 카리스마 있는 동양의 권력자 역할이 어울렸던 것은, 조모 대에 아시아인의 혈통이 살짝 섞였던 그의 가계의 영향도 있었다. 율 브리너는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이었다.



동상의 포즈대로 자세를 잡고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영 보기에 흉하여 올리지는 않으련다. 늠름한 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반갑고,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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