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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신 Jun 23. 2024

접시만 닦으러 갔었다

내가 한 선택은 우연이 아니였다

 “조리를 해보신 경험이 있으시나요” 

유난히 눈이 큰 중년의 여자가 전투태세의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조리는 해 본 적은 없지만 배우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마음과는 달리 입에서 나온 말은 오히려 나를 더 당황케 했다. 

그릇세척 정도를 예상하고 온 자리에 나의 오지랖은 항상 나를 있는 곳보다 더 멀리 가게 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새벽에도 나오실 수 있나요?”라고 맑은 그녀의 목소리에 시간도 두지 않고 “네”라고 대답해 버렸다.


 새벽에 도착한 요양원은 조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잠시 바라본다. 

주변의 나무와 꽃들이 내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는 어두움이 오히려 새벽의 별들을 보게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철장 너머의 개도 아직 일어나지 않아 집 안에 머무른 그 시간에 나는 성큼 조리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난 두 달여간의 경험이 나에게는 어느 버튼이 불빛이 되고 세척기를 작동시키는지를 자동적으로 반응케 한다. 제법 능숙한 손으로 가스 밸브를 돌려놓고 냉장고에 있는 쌀을 전기밥솥으로 직행하고 나니 조리실 시작 전원버튼을 누른 기분이다. 아무도 있는 않는 공간에 오로지 나의 손길로만 작동되는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주저하기보다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니 이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문득 첫날 헤매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가스 불을 켜고 죽을 얹고 프라이팬을 사용하여 조리를 하다 탄 냄새에 다급히 불을 끄고 얼굴을 찌푸린 나의 모습이 암담했었다. 메뉴판에 적힌 당면은 데친 후 양념해서 볶은 채소와 함께 놓을 것이라는 설명은 얼마동안 삶고 양념은 얼마나 넣어야 할지를 감 잡지 못하게 했다. 집에서 해보긴 했지만 고작 5인분 정도였고 50인분을 하기에는 나의 경험과 지식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총을 쏠 줄을 몰라도 전쟁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고 쏘는 법을 터득하겠구나 라는 마음처럼 신기하게 하나씩 익숙하게 되었다. 다른 이의 요리를 눈으로 보고 영상으로 보며 해 보니 경험에서 나오는 산 배움이 산 지식으로 곧 이어지게 되었다.


 요양원은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이 끊임없이 삼시 세끼와 더불어 반복되는 곳이다. 

먹고 싸고 요리하고 깨끗하게 하는 반복적인 일이 쉬지 않고 반복되는 곳이다. 

그 반복에 변화가 있다면 새로 들어오시는 어르신과 삶을 다하시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업무는 주로 조리실에 한정되어 있지만 식사를 이동하는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대충 어르신들의 상태를 짐작할 수도 있었다. “혜숙 어르신은 계란을 안 먹는데 어쩌지” 아침 메뉴로 나오는 계란국을 보고 걱정하는 보호사 앞에 계란 없는 맑은 국을 내밀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 것은 조리를 하고 삼 개월 정도가 지나서였다. “유성 어르신은 밥을 많이 드시는데”라는 보호사의 말을 여러 번 들었던 지라 제법 가득 찬 밥그릇을 그 이름표 앞에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의 스토리들을 듣게 되면서였다. 

그렇게 5인분이 50인분으로 적응이 되자 이곳의 스토리가 들어오고 제법 유연하게 대처하는 나의 모습이 요양원 조리사의 모습으로 영락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하게 된 일은 영어를 가르치던 일이었다. 

스튜어디스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고 집에서 독립하고자 하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일은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다만 대학시절 내내 독하게 훈련했던 영어실력이 그 시대 붐으로 이어진 영어학원의 강사로 나를 합류케 했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 선생님 들과의 교류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의 재미는 평생 나의 업이 되었다. 그 하나만의 일로만 몇 십 년을 보내니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고 힘듦이었다. 하지만 그것 만이 다는 아니었다. 


코로나의 기승이 거의 끝날 무렵 그 와중에도 그로 인해 돌아가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중의 한 분이 나의 엄마였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이유는 그 시작이 코로나가 아니었으나 코로나로 엄마의 임종을 함께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2022년 11월 엄마의 갑작스러운 고관절 골절이 수술로 이어졌다. 코로나로 입원실 면회가 쉽지 않았고 더욱이 엄마는 치매로 자신이 병원에 왜 있는지조차 인식이 잘 안 되었다. 주삿바늘을 못 만지게 침대에 손이 고정되어야 했었다.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도 영상통화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3주 만에 엄마는 코로나에 걸리셨고 결국에 코로나로 돌아가셨다.


점점 노쇠해지는 엄마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이별은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아쉬움이 미안함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서 생활의 분주함을 선택했다. 나는 오전의 여유로운 시간을 뒤로하고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오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의 본업 이외에도 그렇게 시작한 나의 오전일은 요양원 조리원이었다. 

오전 몇 시간만 가서 세척하고 오면 마음도 산만하지 않겠지 라는 생각 외에도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으니 요양원은 어떨 까라는 나의 호기심도 작용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시작한 일은 조리원이었고 조리도 해보라는 권유에 선뜻 수락한 나의 모험심이 나를 새로운 곳으로 내딛게 했다.


그러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선택한 이곳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똑똑한 엄마가 치매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면 선택할 곳이 요양원이었다. 심지어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나는 몇 군데의 요양원을 찾아다니며 알아보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는 요양원에서 엄마가 어떤 음식을 드실지 어떻게 드실지 전혀 알지 못했을 내가 이제는 엄마가 안 계시는 이 세상에서 그 음식을 만들고 있다. 

열심을 다해 음식을 만드는 나의 모습에 엄마에게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묻어 있음을 본다


그렇게 접시만 닦으러 갔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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