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랑 500ml 생수 한 병으로 시작된 설악산 등반

엉성한 여행이 주는 미학

by 김혜신

2주 전에 예약한 숙소

여름휴가를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

결국 이 무더위에 나는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전날에 예매한 버스는 3시간이 안 돼 나를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놓는다.

11시쯤 되었지만 태양의 열기는 지면을 달궈 짭짤한 냄새가 풍기는 바다가 근처에 있음에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지 않았다.

설악산으로 숨고 싶었다.

그곳에 가며 덜 더울 것 같았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재배한 채소들을 팔러 나오신 어르신이 있었다.

양배추 몇 통, 호박, 오이 등 조촐한 좌판을 펼치시고 앉아 계시는 모습에 여러 생각이 스친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농사하시고 장사하셨을까. 한 달에 얼마나 버실까. 이렇게 하셔서 자식들을 키우셨을까' 잠시지만 인생사를 내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설악산행 버스를 탔다. 그런데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탔다. 버스 안에 학생들이 많다 싶어 구글지도를 보니 설악산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 내려 반대편 버스를 탔다.

한낮의 무더위 속에 설악산 입구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설악산에 가면 어떤 코스를 가야 하나' '비룡폭포 쪽으로 간단히 갔다 올까' '케이블카를 타고 전경을 보고 갈까'라는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했다.

사실 어제 제법 축척한 음식으로 인해 식욕은 없었고 집에서 가져온 생수 한 병 달랑 있었다. 식사를 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이 더위에 초콜릿 같은 것을 사서 녹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단체 초등학생들의 하산이 보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들의 표정은 참 다양했다. 피곤해서 시무룩한 아이들, 친구들과 장난치며 내려오는 아이들, 무상무념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아이들을 보니 내 마음속에서 조금 더 가보자라는 작은 오기가 올라온다.

'어디까지 갔다 왔니'라고 물어보니 '울산바위요'라고 한다. 평지의 숲길을 천천히 걷고 올라가면서 나의 최종 목표지를 수정해 본다. '흔들바위까지 가고 지치지 않으면 울산바위까지 가 보지'이렇게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미 울산바위까지 가는 것을 정한 듯했다. 나의 목표의식은 늘 뚜렷해서 애쎠 외면하려고 해도 불쑥불쑥 올라와 스스로를 재촉한다.


한낮의 더위는 역시 숲길에서는 훨씬 덜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바람 부는 소리, 매미소리, 새소리, 나무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지루하지가 않다. 몸서리치게 덥지 않는 이곳에의 시작은 그렇게 되었다.

덥지는 않아도 땀은 계속 난다. 생수병의 물은 거의 바닥이 났는데 슬슬 걱정이 되었다.

'물을 어디서 구하지' 산행길 옆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정 급하면 저 물이라도 마시지라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흔들바위 전 약수터가 보였다. 기도처이기도 한 이곳에서 물을 흠뻑 마시고 여유 있게 생수병 가득 물을 채웠다. 비록 500ml 생수지만 한병 가득 채우니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게 흔들바위까지는 수월하게 올라갔다.

1km 정도 더 가면 울산바위라고 한다. 여기부터는 평지가 아닌 경사라 대부분 계단길이라고 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며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하늘을 가린 나무들의 모습을 감탄하며 보게 된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많이 쉬지 않고 얼른 정상까지 같다오는데 바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걷다 쉬다 반복하고 있었다. 명확한 목표지도 정하지 않았다. '힘들면 하지 말고'라는 마음을 가졌기에 언제든 그만둘 태세가 돼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 쉬고 몸을 일으키니 생각보다 먼저 나의 발길은 울산바위를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많은 계단을 등산객들을 위해 만들었네. 얼마나 힘들었을까'. 를 생각하며 올라가도 힘들었다.

땀은 이미 배낭과 상의를 젖셔 바다의 짠내가 아닌 내 몸의 짠내로 다시 내 코로 들어온다.

태양의 열기로 달거진 난간을 잡는 나의 손이 움칠한다.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다 내려가는 이들에게 물어본다. '울산 바위까지 얼마나 가야 하나요' '20분쯤이요'라는 그들의 시간은 나에게는 가늠이 안된다.

20분의 시간은 20톤의 무게로 나에게 경사와 열기로 가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렇게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모자도 없이, 물도 없이, 장갑도 없이 달랑 빈 생수통 한 병과 튼튼한 다리로.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높은데 올라가면 어지럽다.

그래서 리프트나 케이블카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흔들 다리나 스카이워크는 숨 찾고 가야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하지는 않는다. 20대 호주 배낭여행에서는 번지점프를 했다. 40대 암 수술 뒤에는 춘천에서 집라인을 탔다. 모르고 했고 알고도 했다. 그러니 무서워도 피하기보다는 하는 편이다. 죽음만큼 힘들지는 않나 보다. 하지만 죽을 만큼 무섭다.

그런 내가 점차 올라가며 뒤를 돌아보니 산 아래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보게 된다. 계단에서는 무섭고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서 뒤를 돌아 전경을 보게 된다. 숨이 막힌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름다워서이다. 땅이나 땅 위나 덥기는 마찬가지나 이렇게 산에 온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계단을 오르면서 힘들었던 경험을 덮어버린다. 정상에 올라가니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정기가 느껴진다. 멋지다. 그 이상의 언어로 표현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게 감탄과 함께 영상에 다 담지도 못할 풍경을 나의 눈과 카메라에 담아 본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충분히 즐기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4시가 조금 넘었다. 슬슬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것은 훨씬 수월했지만 다리의 힘이 풀려 흔들거린다. 올라가느라 다리 안쪽이 경직되었을 것이고 내려가니 힘이 풀리며 균형이 흔들거린다. 이래서 스틱이 필요하네라는 생각을 하며 집에 모셔둔 등산 용품이 생각났다. 짐을 최소 하게 한 그냥 떠난 여행이라 산행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다. 그래도 산에 올라갔다 내려가니 준비로 보낸 시간보다는 그냥 떠남의 미학을 즐긴 셈이다. 그렇게 내려가다 다시 약수터에서 흠뻑 물을 마신다. 마른 입을 축이고 목젖을 적시는 물이 참 시원했다. 한병 가득 채운 물을 들고 다시 내려간다. 나의 동행과 함께

산에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나의 동행이 하산하면서 계속 나를 집요하게 쫓아온다. 따돌리려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의 땀냄새가 좋은지 내가 좋은지 벗어나지를 않는다. 날파리인지 모기인지 계속 휘젓는 내 손짓에도 불구하고 하신길 내내 내 뒤통수를 떠나지 않는다.

다음 산행에는 꼭 모기 기피제, 얇은 수건, 여분의 상의, 스틱, 얼음물, 간식을 챙겨서 가져가야 할듯 싶다.

하지만 그럴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있으면 편하고 없어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난 적응력이 좋은 편이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 수도 있다.

내 약한 어깨를 혹사시키는 것보다는 그냥 없어서 살짝 불편한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엉성한 계획으로 시작된 속초의 첫날 여행의 일부가 끝났다.


여행은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더해져 더 기대가 된다.

그것을 경험하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면서 흥미롭다.

때론 나의 반응을 보는 내가 있다. 수많은 나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예전의 나와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는 나의 소리에 과감히 정리하는 단호한 나의 모습도 보게 된다.

일상에서는 미처 경험하지 못하는 환경에 노출된 내가 어떤 선택과 마음을 갖는지를 보게 된다.

그래서 여행을 생각하게 되면 늘 마음이 설렌다.

이번 여행은 좀 더 특별하다.

비슷한 멜로디의 곡에 톡톡 튀는 스타카토가 많이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두려움이나 긴장감보다는 여유가 있으며 망설이지 않은 느낌이다.

혼자 여행의 묘미가 늘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이뤄지는데 그 선택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는 느낌이다.

상큼한 스타카토의 느낌에 나 자신과의 만남이 너무나 설렌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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