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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신 Sep 10. 2024

스토리텔링의 힘

그녀의 삶의 파편의 실체를 이제는 이해한다

억척스러운 엄마로 인해 그 딸도 그렇게 살아야 했다.

일 밖에 모르는 엄마는 무언중에도 나에게 그렇게 살기를 강요하는 듯했다.

내 밑의 남동생 세 명이 있어 가난한 형편에 나 좋자고 공부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일 년 미루고도 학교에 가고자 하는 나를 만류하는 엄마는 너무 야속했다. 내가 되받아 치는 말에 엄마는 따뜻한 말이 없었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엄마가 때려 생긴 내 머리통의 밤송이만 한 흉터였다. 아마도 엄마의 마음에는 그 힘든 인생을 살아내느라 이미 자리 잡고 있을 수십 배의 흉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가서 당당히 말했다. 돈이 없이니 일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런 나를 매점에서 일하게 하며 공부하게 한 학교 측의 배려는 용기를 낸 나에게 큰 선물이었다.

악착같게 살았다.

공부도 일도 설렁설렁하게 하지 않았다.

사는 게 생존이었고 그 생존에는 나의 결핍이 있었다.

내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한 내 어린아이는 나를 늘 벼랑 끝에 서게 했다.

그곳에서는 대충이라는 것이 없다. 전투적으로 사는 삶만 있다.

결혼하고 아들 둘이 자라서 독립을 했다. 학비도 없었던 나는 그 억척스러움 때문에 이젠 건물주로 산다.

그 억척이 악착스러움이 되어 돈을 버니 순식간에 댐을 가득히 채운 물처럼 돈을 벌게 되었다.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어린 두 아들이 자라 결혼해서 손주들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 줄 알았다. 가족과 함께 밥 먹고 손주 재롱 보며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이 꿈같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는 현실은 조금 달랐다.

악착같게 사느라 놓친 작은 행복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행복을 잡고 싶었지만 그 순간의 찰나는 내 손에 머무른 듯하며 흘러가 버렸다.

두 아들들은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지 않았다.

내 며느리들도 내가 주는 사랑만큼 나에게 딸처럼 굴지 않았다.

내 품 안의 귀한 손주들이 자라는 것 이상으로 내 외로움이 더 성큼 커져진다.

좀 더 살 것 같았던 투덜거리는 남편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남편이 가버리니 그가 나에게 얼마나 큰 그늘이 되었는지 알게 된다.

남편의 손길이 남아 있는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있다.

외롭지 않으려고 강아지하고 대화를 하고 이웃과도 잡담을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

더 넓어진 집에 혼자가 무서워 늘 마루에서 길게 대자로 뻗어서 잔다.



인생의 작은 조각들은 실체가 있다.

어디에서 온 줄은 그때는 알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되고 이해가 된다.

그때는 미처 공감하지 못한 이야기가 문득 나에게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 모습에 나의 모습도 있기 때문이다.

일생이 이렇게 얼마 안 되는 스토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다.

그 많은 일들이 특별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 실체에 퍼즐을 맞추고 있을 때쯤이면 나도 문득 나이가 들어감을 느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스스로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것에 잠시 멈춘다. 그곳에서 충분히 머물며 그때 미처 느끼지 못한 감정과 상황을 만난다. 그렇게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를 다시 만나 이해한다. 공감한다. 그렇구나 하며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 그러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 속에서 재 해석을 하게 한다. 내가 생각한 이야기의 흐름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된다. 그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도 있고 뉴스나 개그 프로로 만들 수도 있다.

새로 발견된 부분과 지금의 내가 그것의 방향을 정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그 이야기의 뒷부분을 정한다.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이야기는 마저 쓰인다.



나는 혼자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건강히 살아야 한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림도 배우고 하모니카도 배우고 동사무소에서 논어 강좌도 듣는다.

아픈 다리 때문에 일주일 내내 가는 아쿠아로빅이 요즘은 참 재미있다.

그렇게 노친네들과 노닥거리고 큰 아들과 가끔씩 나가 먹는 외식이 삶의 활력이다.

예전처럼 악착같게 돈 벌려고 살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여전히 악착같게 산다.

그 악착같음은  그렇게 내 존재에 꼭 붙어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진정으로 행복한 방향으로 가길 기도한다.

그 이야기의 한 조각인 나도 이제는 그 실체를 볼 만큼 성숙해진 것 같다.

악착같은 그녀로 인해 받은 감사와 그리고 아쉬움이 있었지만 누구든 완벽하지는 않다.

다 자신의 위치에서 볼뿐이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으로 그녀의 삶도 나의 모습도 보게 된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보는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 그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이게 되면 나에게 성숙이라는 명찰을 달아준다. 그 명찰을 가만히 들여보다 서로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왔는지 또 느끼게 된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잘 살아가기를 위해 기도한다.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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