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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Jan 17. 2024

우리 딸 누구 딸? 아빠, 나는...

[성경] 창세기 24장 22절~67절

창세기 24장을 읽는다.


아브라함의 일꾼이 장래 이삭의 신부 될 여자 '레베카'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족을 만나 자신이 아브라함 집안의 집사 되는 신분으로 그 집 외동아들의 신부를 찾아 아브라함의 고향땅까지 나타난 연유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신의 축복을 받은 집안의 가장으로 이방땅에서 대성 중이며, 그 축복의 대가 이삭을 통해 이어지니 장차 신의 민족을 이끌 자 되겠고, 그 집안의 안주인으로 신이 레베카를 점찍었노라 전한다. 그러자 레베카의 가족이 신의 뜻을 받들고 딸의 결혼을 허락한다. 그래도 딸을 이방땅으로 시집보내는 것이 아쉬워 며칠만 더 있다가 떠나라고 딸아이를 붙드는데, 축복의 성사를 지체할 수 없다고 하는 일꾼의 말에 레베카가 스스로 당장 길을 나서기로 결심한다. 레베카는 가족의 축복과 사랑, 응원을 혼수로 두르고 남편 될 이삭이 있는 네게브로 향한다. 마침내 둘이 만나 혼인을 치르고 이삭이 부인을 사랑하니, 어머니 사라의 장례 후에 방황하던 이삭의 마음이 평안을 찾는다. 아멘.




오늘 24장에서 레베카가 이삭에게로 시집가는 내용을 보면, 과연 저렇게 시집을 갈 수 있을까 싶다. 일꾼이랍시고 온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선뜻 이방땅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겠다고 따라나서는 것은, 순진함인가 철없음인가? 하물며 레베카의 가족은 살만큼 살고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 딸을 저렇게 내준단 말이지? 

저 시대에는 아녀자를 남편을 죽여서라도 취하는 사람들이 이방땅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보낸다는 건 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 24장의 디테일한 내용을 읽어보면 레베카의 집안도 신에게 넉넉하게 축복받은 집안임을 알 수 있다. 곧 자신의 신을 삶에서 겪어보아 신뢰하는 것으로, 딸을 사람의 손이 아닌 신의 손에 맡기는 것일 게다. 앞서 천사가 이삭의 신부를 준비해 두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레베카는 성품도 민족의 안주인에 걸맞게 준비되었지만 온 가족의 믿음 역시 준비되었기에 신을 믿고 딸아이를 신의 손에 맡길 수 있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신은 레베카를 당신의 민족을 만드는 비전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가족은 레베카를 떠나보내며 신의 비전이 레베카로 하여금 열매 맺기를 축복한다. 결국 레베카가 시집가는 곳은 한 가정이 아니라 신의 민족의 품이고 신의 비전의 품이다. 신의 뜻으로 인해 레베카는 자기 사는 고향집 딸내미의 신분을 넘어 비전의 딸이라는 정체성에 눈을 뜨고 과감하게 그 축복으로 향해 나아간다. 그곳이 성경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제자리이기 때문에. 신의 민족의 어머니가 그 자리이기 때문에. 

이삭은 자기 어머니인 사라가 돌아가시자 마음에 평안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레베카가 집안의 공석을 채우니 평안이 온다.   


사실 성경에 다 적히지 않은 별별 인생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 좋아 민족의 어머니지 이방땅 떠돌면서 억울한 일, 더러운 일, 잔인한 일 얼마나 많겠는가. 그리고 평안은 뭐 한 때의 평안이지. 

성경에 적힌 것은 '결국에는' 이러하더라는 깨달음의 역사가 많다. 당시에야 어리둥절하고 이해 못 할 일들이 지나 보니 다 축복되었고, '아 그래, 그러려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지나고 보니 밝혀지는 깊은 뜻. 굳이 종교 없어도 우리 인생사에서 우리가 겪는 깨달음 아닌가 싶다. 

신이라는 존재를 생각해 본다. 나 개인적으로는, 지나고 나니 더 원망스러운 것도 신이었다. 레베카는 이삭에게 시집가고 삶의 고비를 만날 때 속으로 '민족의 어머니? 비전의 딸 좋아하시네!'를 외치기도 했을까? 이 과정 끝에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비전이 있음을 기억하고 매번 설득되어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 아니잖아. 

앗싸리 마음껏 원망할 신이라도 있는 것이 나은가. 차라리 없고 모든 것이 있는 현상 그대로 아무 뜻 없이 전부인 것이 나은가.

축복이란 것은 왜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지고 임팩트가 짧게 느껴질까. 부모는 아이가 싼 똥오줌을 치우고 아이에게 매번 칭찬받지 않고 매번 '내가 니 똥오줌을 치웠단다. 나에게 감사해라' 하지 않거니와, 아이도 매번 똥오줌이 치워지고 뽀송한 기저귀가 채워지는 것을 기쁨으로 받지 않는다. 당연하게 여기며 그 마저도 징징대기도 한다. 그런 건가, 우리의 당연한 축복이란? 너무 어려서 축복이 기저귀처럼 채워졌다 지나가는 것을 기억조차 못하는 건가? 

레베카는 가족의 축복과 사랑, 응원을 받아 들고 남편 될 이삭이 있는 네게브로 향한다. 어쩌면 나도 내 의지로는 지금의 반도 못 갈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복과 사랑, 응원으로 여기까지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믿음이 한 톨밖에 안되어도 저 사람들의 믿음에 기대어서 또 발을 딛고 나아갈 수 있... 겠다.

오케이.

내 부족한 신앙의 발에 타인의 믿음의 신발을 신고 나아간다. 하나님이 채워주는 축복의 기저귀를 차고 아장아장 신이 이끄는 곳으로 신의 손을 붙들고 가는 것이지. 때로는 징징거리면서 때로는 생글거리면서.

또 어느 즈음에서 이룰 평안을 위해. 한 때를 넘어 점점 길어질 평안을 소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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