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세기 25장 1~10절
창세기 25장을 읽는다.
아브라함이 죽음을 맞는다. 175세로 장수하여 온전히 수명을 채우고 먼저 간 부인 사라 곁에 묻힌다. 그의 정실 아들 이삭과 이삭의 배다른 형제 이스마엘이 아버지의 장례를 함께 치른다. 아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인 사라가 아이를 못 낳던 시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권유해서 여종을 취해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후에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했다 해서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신에게 축복받는 사람인지라
그의 핏줄은 다 축복하겠다는 신의 뜻이 있었기에
신은 이스마엘을 돌보아 그에게 적합한 땅으로 보내고 자기 민족을 세우게 한다.
아브라함의 장례를 치를 즈음에는 이삭 역시 아버지의 후계자로
신의 민족을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 있었을 것이다.
장례를 맞아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란히 서는 것은 두 민족의 지도자가 함께 선 것과 같다.
지금도 한 때 형제였던 나라들이 전쟁을 치르는 곳이 있다.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합심하여 치를 수 있는 장례가 있을까?
같이 추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할 수 있다면 왜 할 수 있을까?
TV에서 어떤 장례전문가가 설명하는 장례식 풍경을 들어본 적이 있다.
부모가 명을 달리 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식들끼리 재산 다툼이 더 중요하더라는.
많이들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며 혀를 끌끌 차지만
한편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자식을 키웠길래'하는 마음도 든다.
그들은 어떤 부모였을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마엘은 똑같이 성경의 신이 돌보았다.
사람 뱃속에서 났고 사람 손에 자라다가 내쳐지더라도
신을 받들고 신에게 축복받은 목숨은 신이 개입하여 어떤 고난을 뚫고서라도 강하게 돌본다.
성경의 신이 사람에게 허락한 자유의지와 선택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죄짓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난장판으로 물들이고 고난을 자처할 때에
어르고 달래고 훈육하며 뒷수습, 앞수습에 나서는 것이 성경의 신이라고 읽고 있다.
성경의 신을 부모로 둔 신의 사람들을 묵상한다.
신을 받든다 해서, 말로는 종교가 있다고 해서 짜자잔 하고 어느 순간 천사처럼 되지 않는다.
이미 세상에 물들 대로 물들고 하루 중 23.5시간 세상을 종교로 받들고
나머지 0.5시간 신을 떠올릴락 말락 하며 기도하고 신에게 접속하여
하루의 때를 씻기는커녕 더 화려한 때를 주십사 소원하는 것이 현실.
주일 예배만 간신히 챙긴다 치면, 일주일의 세상적인 삶 166.5시간 VS 주말 예배 1.5시간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신을 그냥 같이 사는 부모님처럼 두고 모시지 않았을까?
다시, 지금 전쟁 중인 서로 이웃되는 나라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무슨 이름의 신을 어떻게 믿고 얼마나 따른다고 주장하던지 간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폭력, 자기 욕망, 돈, 권력 등이라면
그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들의 종교이고 그들의 신이다.
자신들이 실제로 믿는 신은 전쟁과 욕망이라는 우상이지
평화와 형제의 신은 그 자리에 없고 평화를 믿고 형제를 믿는 나라에 가 있다.
신이 편하려고 편한 나라와 편한 가정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지키기에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로 그것을 소원하고 그 축복을 믿기에
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과정이라는 것이 있다.
한 번 있던 믿음이 변질되기도 하고 다시 회복되기도 하고
전쟁이 있다가도 평화가 간절해질 때까지 전쟁이 진행되면
평화의 욕망이 물적인 욕망을 누르고 사람들이 제대로 된 믿음으로 신을 부른다.
오우. 갑자기 내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싶노.
이스마엘과 이삭을 떠올리며
한동안 너무나도 미웠던 내 동생을
많이 사랑한다고 기도로 고백하고 영으로 안아주어야겠다 싶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사랑의 신에게 내 동생에게도 축복 주십사 그를 돌보아 주십사 그를 인도해 주십사
신이 나에게 그리하셨듯이 그에게도 천사를 붙여주시라고
기도해야지.
내 동생이 예전에 늘 사람들 앞에서 나를 조롱하던 것을 떠올리니
그 때의 억울하고 그를 미워하던 마음이
이제는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떠오르는 게
지금은 달다고 한다.
오늘 창세기 25장 읽고
우리가 그저 지금보다 어리고 철없었음을 깨달았기에.
신도 알았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저 어리고 철없었음을.
난들, 우린 들.
아. 오늘의 성경 묵상을 마무리 하며
우상을 받들고 사는 이들이라도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어리고 철없음에
신은 끊임없이 노력하며 우리를 수습해 가겠구나하고 생각이 바뀌어 번진다.
결국에는 서로의 곁에 세우기 위해.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