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세기 25장 19장~32장
창세기 25장을 읽는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40세 되어 장가를 든다. 그런데 부인인 레베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인지라 신에게 기도하고 마침내 쌍둥이를 임신하게 된다.
쌍둥이는 뱃속에서부터 투닥거리고 다투는데, 신에게 이유를 물으니 장차 두 나라와 민족이 될 아이들이 들어 있어 그렇다고 답을 듣는다.
이윽고 아들 둘이 태어나서 '에서'와 '야곱'이라고 이름 붙인다. 에서는 자라면서 기술 좋은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집 지키며 안에서 교육받는 평범한 남자가 된다.
어느 날, 에서가 몹시 배고파 집에 들어와서 야곱에게 네가 만든 죽을 좀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야곱이 형이 먼저 태어났으니 형의 장자권을 죽과 바꾸어 자신에게 팔라고 한다. 그러니 에서가 지금 배고파 죽을 마당에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한다. 아멘.
오늘 본문 내용을 읽어보며, 에서의 말에 공감한다. 내가 지금 당장 쓰러져 죽을 지경인데, 배 채우는 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은 장자권이 무슨 소용인가. 장자권이 밥 먹여주냐.
'장자권'이란 집안의 우두머리의 권리이다.
밖에서 사냥하는 에서는 그 권리가 집안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고,
집안에 거하며 살림 돕는 야곱은 그 권리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에서가 육신의 힘이라면 야곱은 다른 힘을 원한 것으로 본다. 어쩌면 더 압도적인 힘. 장자권이란 집안에 속한 사람들, 즉 그들의 육신의 힘까지 지배할 수 있는 권리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서는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축복의 의미를 몰랐다. 그리고 죽 한 그릇에 축복을 던져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
그래도 내가 그런 그에게 공감하는 것은, 요즘 내가 힘드니까. 지금의 고난에 눈과 마음이 멀고 당장이 급하니까 나는 차라리 살기 싫다는 마음이 습관처럼 든다. 내가 가진 생명의 권리를 얄팍한 고난 앞에 값싸게 내놓고 차라리 달콤한 휴식일 것만 같은 죽음을 취하고 싶다.
생명의 권리. 그게 뭘까?
생명이 허락한 생에는 육신과 가족, 친구, 동료, 앞으로의 변화, 성장, 경험 등... 그래, 참 많고도 많구나.
문득 성경 속의 에서 옆에 천사? 또는 미래에서 온 혼령처럼 서 있는 나를 상상한다. 그럼 에서의 마음에 나는 이렇게 속삭여야지.
"야, 인마! 너 지금 배고프다고 당장 안 죽는다. 차라리 남은 힘을 쥐어짜서 야곱에게 한 방 먹이고 죽을 뺏어 먹어라.
아니지 아니다, 바보야. 그 녀석이 상기시켜 준 니 권리, 너의 장자권으로 야곱에게 명령을 내려라. 내가 이 집안의 장자로서 명하는데, 너는 나에게 음식을 대령하라 하고!
장자권이 있으면 써먹어야지. 그것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니 몫의 권리를 휘둘러라. 당장 눈앞의 현상에 휘둘려 네가 누릴 수많은 축복을 놓치지 말아."
하고 나는 에서를 응원하고 싶다.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응원.
"나 지금 힘들다고 당장 안 죽는다. 죽음이 상기시켜 준 생명의 권리, 그것으로 죽음과 고난에게 명령을 내려야지.
내가 이 생과 삶의 주체로서 명하는데, 나에게는 손발이 있고, 뇌가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무엇보다 신이 있고, 신이 주시는 지혜와 말씀이 있고, 기도와 소망이 있고, 믿음이 있고 축복이 있으니,
고난이여 너는 나에게 경험과 성장을 대령하라. 그래서 나를 더 강하고 힘 있게 하라. 더 크고 넓어지게 하라.”
눈앞의 고난보다는 내가 받은 축복과 앞으로 받을 축복이 더 많다.
짧은 고난은 긴긴 축복에 비할 것이 아니다.
어차피 지나가면 사라질 것은 고난이지 축복이 아니니까.
오늘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로 하여금 깨달음을 받고, 고난 따위는 내 종이라고 하고, 내 생명과 삶의 권리를 행사하기를 선물로 받는다.
내가 그동안 깨닫지 못한 힘을 발견하고 꺼내어 쓰겠군. 힘보따리 개방.
에서야, 나는 오늘 창세기 25장의 네 동생 야곱에게 한 방 먹인다. 니 대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모두들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게 자신이 생명 달고 살아있는 삶의 권리로 쎄게 한 방 먹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