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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Feb 28. 2024

씨발 대신 세바

[성경] 창세기 26장






창세기 26장을 읽는다.


이삭의 이방땅 살이가 계속 된다. 가뭄이 들어 이삭의 일가가 그랄땅에 머물게 되는데, 이 때 신이 나타나서 대대손손 번성을 약속해 준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서 이삭의 재산과 영향력이 커지고, 지역 사람들의 시기심도 커지게 된다. 결국 이삭 일가는 그 지역에서 쫓겨나 우물을 찾아 그랄 골짜기를 헤매게 되고, 우물만 팠다 하면 지역 사람들의 텃세와 내몰기가 반복된다.  

한창 우물을 찾던 중, 이삭 일가가 우물을 하나 파게 되고 그곳에는 아무도 다투러 오지 않는다. 이삭은 이를 신의 은혜로 여겨 그 곳에서 정착을 결심하게 되고, 그날 밤 신이 나타나 그에게 다시 한번 번영을 약속해 준다.

한편 이삭을 쫓아낸 그랄 지역의 지도자들도 이삭에게 나타난 신을 보게 되고 신이 지키는 사람에게 까딱 잘못하다가는 자신들이 화를 입을까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연유로 곧 이삭을 찾아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하고 이삭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서는 그들을 성대히 대접하고 화해하여 조약을 맺는다. 바로 그날, 이삭의 종들이 와서 얼마전 판 새 우물에서 물이 터졌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이삭이 그 우물을 '세바'라고 이름 붙인다. 세바는 맹세라는 뜻이다. 아멘.






오늘 이삭 일가의 상황을 보면서 어째 저 상황에 '씨발' 소리가 안나오나 싶다.

아니, 신이 대대손손 번영을 약속했으면 좀 끝까지 약빨이 있어야지. 신이잖아.

지금 신의 명을 받아서 이땅저땅 떠돌고 있는 마당에 뭐 좀 잘될라 치면 쫒겨나고 또 헤매고.

정말 지겹고 도대체 언제까지 헤매야 되는지도 모를 상황에, 우물 따라 텃세 따라 욕과 신에 대한 원망을 입에 달고 살 수도 있을 법한데.

이삭이 비로서 신을 입에 올린 때는 처한 어려움에서 돌파구를 만났을 때이다. 아직 물도 나오지 않은 우물을 파들어가면서 아무도 다투러 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신에게 감사를 올린다. 그러자 텃새로 몇 번을 쫒겨날동안 감감 무소식이던 신이 그제야 삐죽이 나타나 그를 다시금 축복해 준다.  


이것은 신이 축복을 해서 잘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삭이 스스로 쌔빠지게 버는 축복에 신이 떡하니 숟가락 얹고는 생색내는 것인가.

'거봐라, 내가 상 차리라고 안했으면 니가 굶어죽었지 배가 부를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가 이 상의 주인이다'하는 식의 '이방땅에서 니 우물을 파라고 내가 이방땅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니가 우물을 팠겠느냐.' 뭐 이런? 마치 자기 동네에 가만있었으면 목말라 죽기라도 했을 것처럼.

쩝. 어째 오늘 구절 읽으며 입안이 씁쓸하다.

그런데... 어쩌면 정말 그런건가?

상을 차리려면 상 차릴 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하기는 하지. 찬거리가 있는 곳을 아는 존재가 '거기 가야지 니가 상차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을 따르는 것인가? 그냥 우리 동네 살던데 가만 앉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것을 아는 존재가.


여기서 신이 이삭을 따라다니며 축복을 주는 목적은 하나다. 이삭으로 하여금 신의 민족의 땅을 넓혀가고 신의 민족의 수를 늘리고 그 번영이 대대손손 이어지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삭이 신을 따르는 목적도 하나다. 자신의 선조들로 부터 이어진 자기 집안의 축복을 주욱 이어가는 것.

성경에서는 신이 주는 축복의 스케일이 큰 만큼 그 스케일에 맞는 무대로 신이 자신이 정한 인물들을 인도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누릴만한 힘을 기르게 하기 위해 그들을 훈련해 가고 있다. 세상은 신이 한 때 홍수(노아의 방주 때)와 불(소돔과 고모라 땅)로 쓸어버릴 만큼 타락해가는 사람들로 뒤덮여 있기에.

신이 원하는 세상은 자신의 선한 뜻에 맞게 생명들이 조화롭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선악을 다루는 훈련을 하고 타락한 세상에서도 스스로 굳건하게 그 뜻을 받들며 살 수 있는 신의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은 독립적이 되도록 창조해 두었으니 매번 신이 따라다니며 엎어질 때마다 일으키고 일 저지를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이삭이 마지막으로 새 우물 파 놓고나자 신이  또 축복을 주려고 나타났을 때에는 그에게만 보이도록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방땅 사람들의 눈에도 띄도록 그래서 고위 관리자들이 직접 지켜봤던 소문을 듣던, 다 알게끔 나타났다는 것을 본문 내용으로 알 수 있다. 글을 쓰는 내 마음에 신에 대한 원망이 들어서 소식없던 신이 염치없이 삐죽이 나타난 듯이 앞서 표현했지만, 성경의 신은 당당하게 이삭에게 나타났고 모두가 다 알도록 이삭에게 대외적으로 축복을 주었을 것이다. 이방땅의 관리들이 호로록 달려와서 이삭에게 화해를 청할 정도면 신의 등장이 주는 위엄은 대단한 것.     

이삭이 이방땅에서 모질게 대우받으면서도 신을 원망치 않고 기쁜 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을 찬양하는 태도가 복을 부른다고 본다. 성경 내용을 보아서도 이삭은 정확하게 '축복을 숭배하는 사람'이지 고난을 입에 달고 사는 '고난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입에 무엇이 달렸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숭배하는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무슨 태도로 상황을 헤쳐 나가는지를 대변한다. 어쩌면 그의 마음에 신이 인도한다는 '인도'의 믿음이 없다면 이삭은 어려울 때조차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그 어려움을 벗어나는 사람이 아닌 주저앉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땅 고위관리자들이 이삭의 신을 하는 태도를  때에 성경의 신은 존재 자체가 신의 사람들에게는 방패이고 무기되는 축복이 되는 것을   있다.


이삭은 마침물이 터지는 우물에 '세바'라고 이름을 붙인다. 맹세라는 뜻의  우물이 상징하는 것은 고난뒤에 오는 축복의 여정, 신의 임재와 가호  축복, 축복의 실현, 화해, 고난의 주체(이방땅의 텃새)와의 평화를 의미한다.

... 요 근래 내가 씨발을 좀 외쳤다.

씨발은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불평 불만이 가득하고 고통스럽고, 걱정되고, 불안하고, 마음에 전쟁이 일고, 고난에 휘둘리는, 고난 밖에 못보도록 눈이 멀어 고난에 압도당한, 고난 귀신이 씌여서 하는 고난 숭배의 고백이다.

그렇지만, 나는 고난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의 신, 축복의 신, 지키는 신, 평화의 신, 강하게 하는 신을 유일하게 신뢰하고 숭배하기 때문에 씨발로 외치던 우상 숭배를 그만두고 '세바'를 대신 외치기로 한다.

세바. 모든 것은 축복의 여정이요, 신의 임재와 가호 및 축복이자 축복의 실현이고, 고난의 주체와의 화해와 평화될지어다.


그래, 고난이여. 할 테만 해봐라. 세바.

우리 신이 더 쎄니까. 어우 세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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