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휴가 이후 계약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다니던 회사의 정확한 복귀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6개월 간의 유급 출산휴가가 끝나는 9월 중순, 무언가 확실하게 시작하는게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나는 임신 말기에, 출산휴가 이후 9월에 바로 시작할 수 있을 두 곳의 박사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었다. 한 곳은 영국 옥스퍼드, 그리고 한 곳은 스위스 제네바. 영국 프로그램은 1년 중에 한 달만 가있고 나머지는 원격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제네바대학은 집에서 트램만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남편은 스위스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이미 제네바 베이스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바로 시작 가능할 박사 과정만 지원해야 했다.
감사하게도 출산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보건학 박사 과정으로부터 서류 통과 결과와 인터뷰 날짜를 받게 되었다. 한 달간의 산후조리도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박사 논문주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게 되었고, 인터뷰 날짜에 한 시간가량의 화상 인터뷰에 참석했다. 보건학 프로그램의 학장을 포함 총 세 분의 교수님이 계셨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쓰지 않았던 두뇌가 풀가동 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교수님 한 분 한 분께서 나에게 날카롭고 예리한 질문들을 하셨는데 즉흥적으로 답해나가려니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느끼는 지적 자극은 좋았다.
아쉽게도 옥스퍼드는 최종 합격을 받지는 못했다. 나의 연구 주제와 내가 지원하고자 했던 프로그램이 맞지 않았던 이유여서인듯 싶었다. 하지만 장학금 신청 데드라인도 이미 지나고 지원을 했던 상황이라 다음 해에 다른 프로그램으로 한 번 더 지원해보고, 장학금도 같이 신청하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GRE 시험을 치고 미국 박사 과정 지원도 함께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제네바대학 보건학 박사 프로그램에서는 인터뷰 없이 바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고민이 되었지만 몇 가지 장단점을 생각해 보니 일 년이라도 더 일찍 시작해서 빨리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육아를 하며 공부를 하기에 너무 빡센 프로그램에 가서 힘들게 수업까지 하는 것보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연구에 집중하며 조금 더 여유롭게 하는 게 가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현실적인 선택인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장점은 제네바대학은 스위스 국립 대학교 시스템이라 장학금을 신청할 필요도 없이 학비가 거의 공짜였다. 첫 학기와 마지막 학기만 500프랑 (한화로 약 75만 원), 그 외에 다른 학기들은 모두 65프랑 (한화로 약 10만 원) 밖에 되지 않았다. 비싼 학비와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녀야 하면 나 스스로와 가족들한테도 부담이 될 수 있을 텐데 제네바대학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서 가깝고 제네바 베이스의 국제기구와 보건 관련 기구들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들도 많다 보니 다른 나라 다른 지역의 더 좋은 프로그램을 찾기보다 지금 내 상황에서 주어진 최선의 옵션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2023년 9월에 제네바대학 박사 과정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올해 4월 초에 태어난 아기는 아직 만 6개월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싱글이었을 때는 공부만 하면 돼서 나 스스로 계획한 대로 하루를 보내면 되었고, 결혼하고 아직 아기가 없을 때는, 감사하게도 남편이 많이 맞춰주고 배려해 줘서 내가 하고 싶을 것들을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기가 생기고 나니 일단 몸이 너무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고 하루 중에 계획한 것들의 반 정도만 끝내도 잘한 게 되었다. 아기한테 필요한 것 그리고 아기와 관련된 행정처리 등 챙기고 생각할게 많아지다 보니 하루 중에 연구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박사를 하는 이유를 잘 정리해야 앞으로 3년에서 5년 간의 박사 과정 기간 동안 초심을 기억하고 공부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박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봤다. 그동안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돌이켜보니 답이 나왔다. 나는 무언가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터득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면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미리 고민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고, 나의 생각이 더 깊어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육아도 공부를 하고 있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더 공부하고 연구해서 조금 더 성숙한 생각들을 갖고 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공부를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관을 실현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사실 출산휴가 동안 집에서 아기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기도 했지만, 내 개인적인 시간은 전혀 없다 보니 몸도 힘들고 우울한 마음이 드는 날도 많이 있었다. 내 성격에 집에서 아기만 보며 가정주부로 지내는 건 힘들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할 텐데 커리어를 쌓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상태의 나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게 힘들겠지만, 더 기대되고 즐겁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출산 직후 박사 학위에 도전한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 그리고 시작한 것도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여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내가 행복해지고, 그리고 우리 아기도 그런 나를 보며 행복하게 클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육아와 박사를 하며 어쩌면 곧 다시 직장으로도 복귀해 워킹맘이 되어야 할 나는 응원하며.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고, 하루에 한 걸음씩만 나아가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