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산맥아래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인 산 좋고 물 좋은 나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 중 하나인 스위스에서 오래도록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무척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속편 할 것 같다. 한국인이라면 3개월까지 무비자로 여행을 할 수도 있고, 예외적으로 국제기구나 대표부의 경우 스위스 외교부에서 발급하는 외교 체류증 (carte de légitimation, CDL)을 받아 일정 기간 거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스위스에서 장기 거주를 하고 싶다면, 스위스 이민 사무국으로부터 거주 허가 (permit)를 받아야 하는데 발급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다.
사실 다른 영미권 국가들에 비해서 한국인들의 스위스 이민과 취업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는 듯하다. 어쩌면 그만큼 어렵고 드물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영주권이 아닌 스위스의 일반 체류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단기 노동 허가 (permit L)이고 또 하나는 거주 허가 (permit B)이다. 거주 허가 안에도 풀타임 근무가 가능한 일반 거주 허가와 노동 시간에 제한을 받는 학생 거주 허가 (permit B formation)로 나뉜다.
학생 거주 허가는 스위스에 대학교 혹은 대학원에 진학할 경우 가장 쉽게 발급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거주증에 formation이라고 명시된 학생들의 경우 스위스에 입국하고 만 6개월 동안은 어떠한 노동도 할 수 없다. 만 6개월 이후부터는, 학기 중에는 주 15시간 미만까지 일을 할 수 있고, 방학 기간에는 주 40시간까지 가능하다. 또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먼저 스위스 이민 사무국으로부터 노동 허가를 받아야 한다. 행정처리를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고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2018년 12월에 국경없는의사회의 단기 계약직 자리에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최종 오퍼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의 학생 거주 허가를 가지고는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제네바 이민 사무국에 먼저 방학기간 동안에 주 40시간 노동 허가를 요청해야 했다. 그리고 최종 승인까지 거의 두 달이 넘게 걸렸다. 2019년 1월 초에 국경없는의사회 인사팀이 이민 사무국에서 요청한 서류를 모두 제출했었고, 나도 매주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재촉하였지만 처리해야 할 신청건이 많으니 더 기다리라는 답변만 받았다. 노동 허가를 받는 기간 동안은 계약서가 있더라도 일은 시작할 수 없었다. 몇 달이고 수입도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한다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스위스에서 대학 혹은 대학원을 졸업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스위스 사기업의 취업을 도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떠나는 경우가 다반수이다. 특히나 경력이 별로 없고 젊은 청년들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스위스 정부는 스위스에서 공부한 학생이라면 졸업 이후 6개월 간 스위스 내에 취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단기 노동 허가 (permit L)을 신청하면 발급해 주는 정책을 만들었고, 졸업생이 자신의 전공 분야의 일을 찾는 기회로 사용하길 권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발급된 단기 노동 허가로는 6개월 동안 주 15시간 미만으로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일을 하려면 결국 거주 허가 (permit B)를 받아야만 한다.
그럼 도대체 스위스의 학생 거주 허가 말고 일반 거주 허가는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을까? 아래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키면 된다.
(1) 고급 인력 (qualified migrants), 예를 들면 회사에서 관리자 또는 전문가이거나 특정 분야에서 수년 이상 일한 경력자
(2) 스위스 또는 EU/EFTA 출신의 노동자로 채용 불가능한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자
(3) 현재 거주 허가를 지원하는 주 (칸톤)에 노동 허가 발급 건수 (쿼터)가 아직 남아있는 경우
즉 스위스 혹은 유럽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며, 현재 내가 거주 허가를 지원하는 주에 쿼터가 아직 남아 있어야 한다. 쿼터란, 스위스 이민 사무국은 제3국 노동자에 대해 노동 허가 발급 건수를 제한하는 정책인데, 연방의회가 매년 주 정부와 협의하여 차년도 최대 발급 건수를 정한다. 취리히 한국 무역관의 자료에 따르면 2023년의 경우, 최대 1년인 단기 노동 허가 (permit L) 4000개와 장기 노동 허가 (permit B) 4500개를 합해서 총 8500개의 쿼터가 있다. 각 주의 규모와 노동 시장 수요에 따라 각 칸톤별로 나눠 주고 나머지는 예비로 비축했다 추가로 더 필요한 주에 배분해 주는 시스템이다. 2023년 취리히에서는 250개, 베른에서 150개, 제네바에서 100개 정도를 초기 배분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나를 채용하고자 하는 기업에서 채용 정보를 스위스와 유럽 내에 충분히 알려야 하고 스위스 자국 인력과 유럽 내에 인력을 채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입증하면서 다른 입사 지원자들의 자격 부족 이유를 간략히 정리해서 제출하기도 해야 한다. 이렇듯 구비 서류도 많아지고 번거롭다 보니 진짜 "인재"가 아닌 이상 스위스 기업에서는 제3국 노동자를 뽑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서류가 완벽해도 쿼터를 마침 다 써서 더 이상 거주 허가를 발급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이민 사무국에서 신청서를 검토하다가 다른 어떠한 이유로 신청을 거부할 수도 있다.
스위스 거주증을 받으려면, 운도 따라줘야 하는 이유다. 유럽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이자 최저임금도 높고 수많은 유럽인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나라가 스위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드물기는 하지만, 스위스인 혹은 스위스 거주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가족연합(family reunion)의 사유로 거주 허가를 바로 발급받을 수도 있다. 스위스 국적자와 국제결혼을 하게 되신 분들 혹은 부부 중 한 사람이 스위스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면, 다른 한 사람도 덕분에 훨씬 편하고 수월하게 취업을 하게 되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EU/EFTA 회원국민의 경우 거주 허가 (permit B)를 가지고 만 5년 이상을 체류하면 스위스 영주권인 permit C를 신청할 수 있다. 한국인 포함 제3국 노동자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만 10년 이상을 체류해야 스위스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만 5년 이상 체류 이후, permit C anticipé라는 예비 영주권을 신청해서 받을 수 있다. 예비 영주권은 일반 영주권의 모든 혜택을 미리 동일하게 누리되, 만 5년을 마저 채워 차후 최종 영주권을 받게 되는 경우다. 또 다른 예외는 스위스 대학 교수가 되면, 제3국 노동자더라도 거주 허가가 아닌 바로 스위스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