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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Yejin Lee Jul 07. 2024

스위스 사람들의 월세살이

스위스 사람들은 대부분 월세로 산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60% 이상의 스위스 사람들이 월세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2021년 기준으로는 36% 정도의 스위스 인구만이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만 있는 전세라는 제도가 스위스에는 없기 때문에, 집을 사지 않는 이상, 월세살이를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지난 20년 가까이 해외에서만 살다 보니, 한국의 주거 실태가 어떤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스위스 부동산 시장 조사로 제네바에 방문한 한국 공무원들의 통역 의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한국에서 월세로 사는 건 불이익이 많다고 한다. 단기간 월세로 사는 건 괜찮을 수 있지만, 몇 년 이상 생각을 하면 월세로 사는 집에서는 집주인이 나가라고 할 수도 있고 월세 가격을 올릴 수도 있고. 월세 세입자로 사는 서러움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적어도 전세 혹은 매매를 통해 내 집 마련을 꿈꾼다고 했다.


스위스는 다르다. 스위스는 월세라는 시스템이 한국보다 합리적인 나라이다. 실용적이고 유연하게 삶을 꾸려나가고 싶은 사람에겐 월세가 전혀 나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네바에서는 세입자가 3개월의 통지기간만 가지면, 언제든지 아무런 손해 배상 없이 월세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 심지어 바로 들어올 다음 월세자만 찾아 놓으면 1개월 만에도 월세 계약을 해지하고 이사를 나갈 수 있다. 보통 월세가 싸고 좋은 집의 경우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가게 되더라도 큰 손해를 보지 않고 나갈 수 있다.


물론 스위스 사람들도 가능하다면 집을 사서 소유하고 싶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네바의 경우, 방 2개짜리 집이 한화로 최소 20억 이상은 하는데 집 값의 20% 이상을 현금 자산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집을 살 수 있다. 높은 초기 비용은 높은 진입 장벽을 만든다. 자신의 연봉 수준에 따라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기도 해서 대출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현금으로 집 값의 20%보다 더 많이 준비를 해야 한다. 스위스의 높은 집값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집을 사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특히 자산이 많이 없는 젊은 사람들은 집을 사기보다는 월세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변에 스위스인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한국처럼 내 집 마련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크게 있는 것 같지 않다. 한 집에 10여 년 혹은 더 긴 세월을 월세로 사는 스위스 가정도 많이 봤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월세가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내가 그동안 살았던 집도 내가 몇 년간 사는 동안 월세가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현 세입자가 나가고 다음 세입자를 받기 전에 월세를 조금 올리는 경우는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사를 나가지 않고 한 곳에 계속 산다면 월세가 크게 오를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일부 월세 계약서에 거주 기한이 정해져 있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집주인은 현재 살고 있는 세입자를 강제로 쫓아낼 수도 없다.


이렇듯 스위스 세입자는 제법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제공받는다. 하지만 한국처럼 보증금이나 전세금만 있다고 월세집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대부분의 월세집에 여러 명의 지원자가 있다. 먼저 지원하고자 하는 집의 오픈데이에 집 앞에 줄을 서서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방문하거나, 미리 현 세입자와 약속을 잡고 방문해서 집을 둘러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집을 둘러보았다는 전제하에, 지원 서류를 제출하면 된다. 그러면 집주인은 제출한 서류를 심사해서 누가 세입자가 될지 결정해준다. 경쟁이 치열한 제네바 월세집의 경우, 한 집에 100명 이상의 지원자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무리 지원자가 없어도 5명에서 10명 이상은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월세집을 구하는 경쟁이 높다 보니, 추가로 잘 보이기 위해서 회사에서 추천서도 받고, 자기소개서와 지원 동기서도 첨부해서 넣어야 통과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특히 싸고 좋은 집을 지원할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불어권 스위스 지역의 경우, 월세집에 지원하는 서류 중에는 (1) 지난 3달간의 월급명세서 (2) 과거 채무 혐의가 없다는 증명서 (3) 스위스 거주증 등이 필요하다. 내가 집을 지원했을 당시에는 추천서와 자기소개서에 나의 성격에 대한 내용과 주변 이웃들과도 잘 어울리며 지낼 수 있다는 등 별의별 내용을 다 적어서 냈던 기억이 난다. 월급명세서를 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스위스에서는 월세집 가격이 가정 총수입의 1/3을 넘기면 안 된다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학생들의 경우, 수입이 충분하지 않다면 월세집을 구하기는 훨씬 더 어려운 현실이다.


흡사 치열한 취업과 같은 스위스 월세집 지원 과정은 여러 집에 끊임없이 지원을 하고 어딘가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와야 끝이 난다. 여러 집을 지원하고 며칠 내로, 내가 세입자로 선택된 집의 집주인 혹은 불어로 레지(regie)라고 불리는 월세집 담당 부동산에서 나를 세입자로 선택했다는 전화를 걸어온다. 그리고 바로 그 집에 이사를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해서 통보하면 된다. 내가 거절할 경우, 바로 그다음 후보자에게 기회가 넘어가게 된다. 이사를 들어가겠다고 결정해서 알려주면, 레지에서 월세 관련 계약서를 만들어서 우편으로 보내준다. 그럼 우편으로 받은 계약서 내용을 잘 검토해서 최종 사인을 해서 다시 우편으로 보내주면 된다. 그리고 은행에 가서 3개월치 월세 보증금을 예치하고 증빙서류를 제출하면 월세집 찾기의 과정이 끝이 난다.  


여러 집에 지원을 하고 다른 집의 서류 심사 결과가 아직 안 나왔을 경우에는,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바로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거절을 했는데 다른 집들이 아무 데도 되지 않게 되면, 집을 계속 찾고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자신의 기준에 맞는 집이 되면 그냥 결정해서 계약을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월세 가격, 집의 상태, 위치 등 모든 게 다 내 맘에 드는 월세집을 고집하다 보면 결국 집을 제때 못 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위스의 월세집 계약은 보통 매달 1일 혹은 15일에 시작하는데, 그전 세입자가 언제 나가느냐에 따라 언제 계약을 시작할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계약 형태는 집주인의 입장에서 월세가 조금도 끊기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게 해준다.


월세 계약이 시작되는 1일 혹은 15일 전후로 이사 날짜가 정해지면, 집주인 혹은 레지 직원과 불어로 에따드리우 (État de lieu) 라고 불리는 입주 점검을 한다. 입주 점검 서류에는 집안 구석구석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하게 되는데, 문제가 있는 경우에도 꼼꼼히 기록해 둔다. 이는 세입자가 나중에 이사를 나가게 될 때, 들어올 때의 상태와 같이 만들고 나가야 한다는 기준을 위해 기록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월세로 살다가 이사를 나갈 때, 집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입주 점검 서류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모든 수리 비용을 청구한다. 예를 들면, 벽에 얼룩이 졌거나 못을 박은 구멍이 메꾸어져있지 않거나, 바닥이 긁혔거나 빌트인 가구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모두 추가 비용이 청구된다. 그러면 입주 전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3개월치 월세 보증금 중에서 청구 비용을 다 차감하고, 남은 돈만 돌려받게 된다. 스위스의 수리 비용은 별 것 아닌 것도 몇 백 프랑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사 나가는 날 레지와 하는 마지막 인스펙션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편이다.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스위스에서는 월세집에서 이사를 나갈 때 대청소를 해놓고 나가야 한다. 창문 창틀부터 모든 집안의 빌트인 가구들의 서랍, 그리고 인덕션과 환풍기, 냉장고, 식기세척기, 세탁기 등 가전제품까지 모두 깨끗하게 씻고 닦고 정리해서 새 집처럼 만들어 두지 않으면 엄청난 비용의 청소 및 수리 비용을 레지로부터 청구받게 된다. 청구받아서 청소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개인적으로 청소 업체를 고용하는 것보다 몇 배 더 비싸기 때문에, 청소를 말끔히 해놓고 나가야 한다. 물론 스스로 청소도구를 가지고 청소를 할 수도 있지만, 이삿짐을 싸고 이사 준비를 하면서 청소까지 직접 하고 나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지 청소 전문 업체를 고용해서 청소를 맡길 수도 있는데, 높은 스위스의 인건비 덕분에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청소에 기본 1000프랑 (150만 원) 이상은 생각해야 한다.


통역 의뢰를 하며 만났던 제네바대학교의 부동산 금융정책 담당 Martin Hoesli 교수님 얘기에 의하면, 스위스에는 집을 사는 것보다 렌트하는 문화적 선호도가 강하게 있다고 한다. 집을 사게 되었을 경우 집에 대한 여러 법적, 행정적, 세금적 문제들을 다 책임져야 하는 반면, 월세로 살면 더 유연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월세로 살면 부동산 자산 소유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유지보수와 리노베이션은 집주인의 책임이므로 월세로 사는 동안 집의 유지보수 문제는 집주인에게 요구하면 되기 때문에 더 편하다고 했다. 또한, 직장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이라면, 큰 계약금을 지불할 필요도 없고 은행 융자를 받지 않아도 되고 원하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쉽게 이사나갈 수 있는 월세가 더 이상적인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위스에서는 전 국민의 60% 이상이 월세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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