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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 Jul 09. 2021

맞닿아

미래의 이탈리아인 사위를 위하여 이탈리아어를 오늘도 공부합니다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고 여기는데도 새로 맺은 인연과 그 끈이 닿아있고 그런 경우를 요즘 자주 마주한다. 결국 그 소집합들의 경계가 맞닿아 서로를 찾고 끌어당기는 거겠지. 가능하다면 이리저리 올챙이처럼 몸집을 작게 만들어 피하도록 하자 싶다.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하고 딸아이가 먹다 남긴 샌드위치와 과일을 집어먹으면서 이탈리아의 오랜 유적들을 사진으로 모아놓은 것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문득 허수경 시인이 떠올랐다. 그것들을 마주하는 동안 시인의 문장들이 떠오른 걸 보면 혹여 시인도 그 유적들 마주하는 동안 느낀 것들을 문장으로 만든 걸지도. 수많은 해골들이 한 권의 책을 펼치며 여기저기를 거니는 그림을 마주했다. 책은 불멸의 사물이나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인지라 더 간절해지는 걸지도. 허무하구나 이미지를 마주하는 동안 소리 내어 중얼거리는데 그림 아래 해설에도 허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책을 읽고 외국어를 익히느라 잠을 3시간밖에 못 잔다는 아줌마 글 보았다. 아이쿠나 뭐 그렇게씩이나 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보니까 번역가다 직업이. 그렇다면 뭐 그럴 수 있지요 고개를 쉬이 끄덕거린다. 잘은 모르겠지만 직업이 번역가라면 끝없이 공부를 하는 건 운명 아닌가. 외국어를 익히는 건 본업으로 하는 외국어 외 다른 외국어를 취미 삼아 공부하는 듯싶다. 조바심 나는 피어 리드인가 보다.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그 조바심 피어리드가 생기기 마련인 듯. 그때를 잘 넘기면 레벨업, 그때 엎어지면 다시 제로. 언젠가 친구가 나는 잠이 많아서 공부하기는 글렀어 라고 했는데 나 역시 평균 7시간 이상을 수면 시간으로 보내는지라 그 말이 뜻하는바 뭔지 안다. 어딘가에 닿고자 읽는 건 아니지 싶다. 이 모든 걸 모으고 쌓아 엮어  하나의 결과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는 이들이 있다면 논문을 써야 하는 학자들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을 하게 되는 듯. 빌 브라이슨을 읽고 난 후 새삼 장난으로 건드리는 건 좋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일 수도. [언어의 탄생]을 읽고 난 후 필멸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어제 딸아이, 수학 시험은 잘 보고 사회 시험은 망쳤어. 얼마나 잘 봤어? 하나는 너무 어려워서 답 쓰지 못했고 하나는 찍었어. 그러니 최소 2개는 틀렸지. 딱 2개만 틀렸으면 좋겠는데 더 틀렸을 수도 있고. 사회는 어떻게 망쳤어? 서술형이었어. 4문제였는데 4문제 모두 어려웠어. 말도 안 되게 마구 썼어. 쓰는 내가 한심하더라. 망했다 하고 느꼈지. 선생님도 채점하시면서 개판이구만 느끼실걸. 글 쓰는 게 어렵지는 않잖아? 물어보니 곰곰 머리를 굴리다가 글은 숫자랑 달라 엄마. 숫자는 딱딱 떨어지잖아. 어렵고 어려워도 해답이 있어. 하지만 글은 정답이 없잖아. 답과 내 생각을 모아서 섞어야 하니까 그걸 읽는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 논리적인 글이 아닐 때는 공감이 되어야 하고. 그게 쉬운 일이 아닌 거 같아.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쓰면 좋은데 정리가 안될 때 많고 나는 쓰다가 자꾸 산으로 가. 엄마도 그래? 산으로 가면 산으로 가는 맛이 있어. 산으로 갔구나 망했다 할 때도 있는데 또 산으로 가서 아이디어 얻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럼 나중에 고치면 돼. 너는 완벽주의 경향이 있어서 단번에 완벽한 글을 써내려고 그렇게 자꾸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그러는데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일단 써. 그리고 완성작을 읽고 다시 고쳐. 하지만 그러려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잖아. 그게 더 힘들어. 하고 요상한 논리를 갖고 나오는. 계속 딸 말, 글은 참 이상해. 내 친구들이 쓴 글 보면 모두 다 자기를 닮았어. 그래서 더 재미있고. 나는 말을 꾸미는 게 좋아. 아름답게 꾸며주고 싶어. 내 생각이 아름다운 문장이 된 걸 보면 기분이 좋아. 엄마는 어떤 글이 좋아? 엄마는 솔직한 글. 나체 같은 글.이라고 답하니까 딸아이 대답, 역시 우리 엄마는 변태인지라 나체 같은 글_이라고 하네. 너 혹시 니네 친구들한테도 엄마 변태라고 말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어보니 내가 우리 엄마를 왜 욕하고 다녀. 내가 바보야?! 바보 아닌 거 알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가끔 짜증 날 때도 있는데 난 엄마가 솔직해서 좋아. 너무 다 밝히려고 할 때는 부담스럽지만. 그건 엄마가 사수자리라서 그래. 응 나두 알아. 엄마는 사수자리라서 거름망이 없어. 그냥 다 말해버려. 사회생활 거의 하지 않은 티가 난다고 할머니였나 아빠가 그때 그랬는데.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이들은 그런 이들끼리 또 장점이 있을 거야. 물론 단점이 압도적이긴 할 거 같지만. 굳이 이 나이가 되어 없던 장점을 만들겠노라고 예의 바른 인간이 될 수도 없고 생긴 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니? 아가 말했다. 







 어젯밤에는 뭔가 끄적거리고 싶어서 한참 동안 노트북을 켜놓고 앞에 앉아있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책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저녁 바람이 하도 좋아서 바람 이야기를 하려다가 관뒀다.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편지를 누군가에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어 커서가 깜박거리는 빈 공간만 한참 노려보았다. 오늘은 글렀다 하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노래만 실컷 들었다. 각자 책 읽다가 잠들 무렵 딸아이가 너무 더워해서 창문을 활짝 열고 잤다. 선풍기를 켜고 자는 건 내키지 않는다. 미친 듯이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지 않는 이상.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어땠는지 찬 바람이 확 불어 새벽 두 시 넘어 잠깐 깼다. 아 살아있다 우선 그 문장이 떠올랐다. 스타카토처럼 딱딱 끊어서 아. 살. 아. 있. 다. 몇 시인지 확인하려고 폰을 열어 확인을 하고 지금 깨면 답 없다 창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원하다 좋다 살아있다 딸아이 이불 덮어주고 꼬옥 안았다. 맞닿아 있다.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보다 자그마치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나 허둥지둥 딸아이 등교 준비를 하고 청소를 하지도 않고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어놓고 선선한 바람이 춤출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청소 다 하고 비가 쏟아질지도 모르니 도서관에 갈 때는 우산을 챙기고 들어오는 길에 와인샵에 들려서 상큼한 화이트 와인을 하나 사 갖고 올까 싶은데 술 줄여야 하니까 그냥 마트에서 매실주 작은 병으로 하나 사 갖고 와야겠다. 오랜만에 남편이 온다. 청소를 하고 오늘은 체조를 어제보다 10분 더 해보자. 어제는 깜박한 이탈리아어 공부도 오늘은 한 시간. 엄마 오늘 결과 좋아서 다음 주 평일 퇴원하시기만 바란다. 이번에 엄마 아프고 느낀 것들 아직 정리는 하지 못했지만 인간은 필멸의 존재,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껏 사랑하고 즐겨야 한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일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평안을 가져다주는지, 다른 사람들 눈 의식하고 살지도 않았지만 앞으로 더 그래야겠다는 결심. 제멋대로 사는 인간인지라 피해 끼치는 경우 잦지만 그래도 더 제멋대로 살자 이 마음. 멀어져 가는 인연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자. 다가오는 맞닿음도 막지 말자.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탈리아인들과 한 명씩 온라인 친구를 맺는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려는 한국인과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탈리아인이 온라인 친구가 되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쳐주고 한국어를 가르쳐준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하려면 그렇게 인토네이션을 세게 붙이면 안 돼, 한국어는 그렇게 인토네이션 강하지 않아 나도 모르게 잔소리. 그럼 상대방이 윽 하고 멈칫하는 순간 느껴진다. 미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다 나와버렸어. 그럼 뭐 나는 자연스럽게 또 당한다. 이탈리아어는 그렇게 발음하지 않아, 좀 더 부드럽게 너 거기 악센트 주면 안 돼 하고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하는. 어제는 내가 이탈리아인 연인을 사귈 것도 아닌데 이탈리아어 확 관둘까 보다 넘 어렵다 했더니 딸아이가 이탈리아인 사위를 얻을 수도 있잖아 해서 그렇지 그렇다면 해야지! 조각상 같은 내 미남 사위! 하고 이탈리아어 5분 했다. 그래서 결론은 이탈리아어 공부에 매진하도록 하자. 네 또 산으로 갔군요. 산으로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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