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웬만한 남정네 보다 낫다고 자부했었다. 부모님 모두 이북 함경도 출신이었는데, 전쟁을 예감한 집안 어른들이 산골 중에도 제일 산골인 강원도 정선에 가서 전쟁을 피하라고 해서 그곳 돈니치에 터를 잡게 되었다.
"의사가, 위암인데 손을 쓸 수 없다고 해서 퇴원을 했지, 영월 도립병원에서 예미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 니 애비가 나더러 하는 말이, 소 두 마리 있는 것 팔아서 애들하고 살라 그러더라..... 내가 마지막 말(유언) 하는 거냐고 물으니 아무 말이 없더라구..... 너는 내 등에 업혀서 얼마나 자지러지게 울던지... 니 애비도 기가 맥혀서 아무 소리 못했던 것이겠지.."
엄마가 가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땐 꼭 그 이야기를 했다.
정말 내가 "애비 잡아먹은 새끼"여서 미워했던 것일까? 아버지 제삿날 매를 맞았던 기억이 아팠다. 제삿날이면 엄마는 옆집 연주네 아버지를 불러 지방과 축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고, 우리는 연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 제사가 끝난 뒤 형과 내가 제사상에 있던 과자를 가지고 다툼을 하면 형에 비해 더 독한 매질을 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 엄마는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애비 죽어서 제사를 지내는데, 어린 새끼들이 과자를 가지고 다툼을 하니 얼매나 기가 맥히나...."
돈니치는 정선에서 동강을 따라 영월 방향으로 내려오다 왼편으로 접어들어 산골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돈니치라는 마을 이름은 불은 흙이 찰지고 부드럽다는 뜻이었는데, 비가 오면 발이 진흙에 빠져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다. 벌목을 하는 차들도 우리 마을에 오면 바뀌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의 삶이 돈니치 지명처럼 진흙 수렁 일지 몰랐다.
모를 일이었다. 고향에서 엄마는 고되게 사셨지만, 늘 당당하고 밝았다. 마을에서 잔치라도 벌어지면 음식 만드는 일부터 뒤풀이 물박 장단을 치며 정선아라리 노래를 나누는 일까지 엄마가 빠져서는 안 된다고들 했다.
엄마는 여름엔 농사를 지었지만 농한기가 되면 약초를 캐거나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 그때는 돈니치에 신작로가 나기 전이었다. 어른들이 신동에 나가 장을 보면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고 말구렁재를 넘어야 했다. 엄마도 빵 장사를 위해 말구렁재를 넘어 밀가루를 가지고 와야 했다. 말구렁재는 맨몸으로 넘기에도 숨이 찬 30리 고개였다. 엄마는 20킬로 밀가루 두 포대씩 머리에 이고 그 고개를 수 없이 넘나들었다.
빵 찌는 냄새가 동네에 퍼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방에서 빵을 먹거나, 포장을 해서 싸 갔다. 단 맛이 귀할 때였다. 엄마는 찐빵 위에 설탕을 아끼지 않고 구름처럼 얹어 주었다. 저녁에 빵을 팔고 남으면, 엄마는 아침에 그것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이웃 마을로 팔러 나갔고, 오래지 않아 다 팔고 돌아왔다.
그렇게 억세게 살던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엄마는 물론 형과 나도 엄마와 같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엄마가 어른들에게 업혀 읍내 한의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떠나고, 형이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 나는 여러 달을 혼자 지냈다. 밥은 누나네 집에서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어두운 집에 혼자 지냈던 기억은 내 마음에 깊은 악몽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