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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10. 2020

모진 바람

냉대와 따돌림

아이들도 약자를 잘 알아봤다. 일단 약하다고 판단하면 공격할 빌미를 만들어 끊임없이 괴롭혔다. 고향에서 큰집으로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자기들과 다른 날 알아봤다.  같은 또래인데 학교는 다니지 않고 남루한 차림으로 주전자를 들고 술 심부름을 다니는 나를 이상하게 본 모양이었다.


엄마가 늦게 낳아서인지 난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고 약해서 아이들이 날 쉽게 여겼다. 그래도 고향에서는 형이 버티고 있 나에게 함부로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큰집으로 이사 온 후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도회지 근처여서 인지 아이들이 영악해서 고향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고향에서는 아이들끼리 싸움을 한다 해도 발을 걸어 넘어뜨리거나 코피가 터지면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이곳 아이들은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위협을 했다.


걸리를 파는 집은 이웃 마을에 있었다. 술 심부름을 위해 이웃 마을을 오가다 보면 패를 이뤄 학교를 오가는 내 또래 아이들과 마주쳤다. 이웃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개천을 따라 난 둑길과 신작로가 있었는데 둑길이 지름길이었다.  심부름을 가다 멀리서 오는 아이들을  보면 피할 수 있는 빈 길을 택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토끼몰이를 하듯 내가 천천히 걸으면 아이들도 시간을 끌고, 달음질을 치면 더 빨리 뛰어 나를 막아섰다.


어쩌면 자신들과 다른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인근 마을에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 유일한 아이였고, 덩치도 작아 마음대로 해도 뒷 탈이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아는 욕설과 몇 번의 주먹다짐을 당했을 뿐이지만, 그 경험은 내가 세상 어디 기댈 곳이 없다는 막막함으로 이어졌다.


큰어머니는 "남의 자식한테 잘해줘 봐야 소용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의 자식이란 말이 나와 형을 가리킨다는 것은 나중에 어느 정도 철이 든 다음에야 알았다. 큰어머니는 큰아버지가 본처와 사별한 후 재혼한 여자였다. 큰아버지와 본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고, 지금 큰어머니와의 사이에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큰어머니는 본처 소생의 그 아들을 무슨 이유에선지 몹시 싫어해서 집안에 대소사가 있어 같이 모이면 반드시 큰소리가 났다.


"남의 자식한테 잘해줘야 소용없다"는 말을 나는 본처 소생의 그 형을 두고 하는 말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니 내가 큰집에 사는 몇 년 동안 큰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붙인 적이 거의 없었고, 내가 말을 붙이면 싸늘하게 쏘아붙이곤 했다.


한 번은 큰어머니가 원주에 장을 보러 집을 나선 후, 사촌 형이 성냥이 필요한데 잊었다며 얼른 뛰어가 큰어머니에게 전하라고  했다. 달려가 "큰형이 성냥 사오 시레요"하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잘 못 들으신 걸까? 묵묵히 따라가다 다시 한번 "형이 성냥 사 오시래요"하니 큰어머니가 나에게 눈길로 주지 않고 혼잣말로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불러..." 나에게  알았다는 말 조차 섞기 싫었던 것이었다.


언젠가 사촌 누나들과 큰어머니가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큰어머니가 동전을 가지고 있었고, 누나 둘이 그것을 서로 차지하려 큰어머니와 몸을 부대끼며 장난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터라 누나들과 합세하여 장난에 끼어들었다. 그 순간 큰어머니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시면서, 장난이 끝났다. 큰어머니가 동전을  방바닥에 탁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솜틀집에서 일하는 동안 늘 배가 고팠다. 다른 사람보다 곱절을 먹어도 돌아서면 허전했다. 솜틀집 며느리인 윤 권사님은 간식 시간이면 샌드위치며 우유며 늘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어린아이처럼  작던 내 몸이 빠르게 크고 있었다.  은 봄가을이 몹시 바쁘고 겨울보다 여름이 한가했다. 늘 먼지 가운데서 일하고, 솜 트는 일이며 배달일이 쉽진 않았지만, 마음은 편하고 좋았다.


집 문제로 마음이 급했다.  아들이 돌아 올 날이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가 아직도 갈 곳을 못 찾고 있으니 집주인 분들이나 우리나 애가 타 긴 매일반이었다.

그날도 걱정을 하며 집에 들어서니 엄마가 나를 불러 집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반신불수로 왼편 팔과 다리를 전혀 못써 몸 가누기도 어려운 엄마가 어떻게 살 곳을 마련했는지 궁금했다. "내가 전도사님한테 가서 교회 창고에서 살게 해 달라 했다." 교회건물 뒤켠에 온돌은 있지만 천반 없이 지붕만 스레이트로만 덮힌 창고가 있었다. 이 교회를 지을 때 전도사 부부가 임시로 거쳐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잡동사니로 채워진 창고였다. 난방도 되고, 풍로를 놓으면 밥을 해 먹을 수도 있었다.  


낮에 엄마가 지팡이를 집고 한나절이나 절뚝이며 걸어가 사정을 하자 전도사님도 거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천만 만만 다행이었다. 바로 창고를 정리하고 이사를 했다.  당분간 거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때 교회에는 목사가 시무하지 않는 교회여서  전도사님이 교회일을 운영할 때 였다.   


 늦가을이 되자 다들 김장으로 바빴다. 교회 여집사님들이 배추며 양념을 챙겨 와 김치를 담가 주었다. 김장할 형편이 못되어 근심하던 중이었다. 왁자지껄 즐거운 소란이 벌어지고, 김치 한 동이가 부엌 한쪽에 놓이니 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집에 있던 가루 주스를 타서 한 컵식 드리는 것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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