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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07. 2020

주천에서 겪은 일

피 눈물

작년 여름 책을 읽다 큰아버지에게 행패를 당한 후 가출을 했었다. 엄마와 같이 살도록 받아 줄 일자리가 간절히 필요했다. 공장 쪽을 알아봤지먼 나 혼자라면 몰라도, 반신불수인 엄마와 같이 받아 줄 곳은 구할 수 없었다. 공장 취직을 포기하고 주천에 갔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반가운 소식을 말해줬다. 주천에서 농사를 많이 하는 댁에서 일할 사람을 찾으니 가보라 했다. 어게 그 집을 찾아 주인을 만나 사정 이야기를 하니 "일하는 것을 보고, 일을 잘하면 엄마와 같이 살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덩치도 작았지만 일하는 손놀림이 빨랐다.  논을 매고 물길을 챙기고 짐승 돌보는 일을 보름 정도 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희망에 부풀어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했었다.  잘하면 이 집에서 일하면서 얼마간 돈도 받고 큰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옥수수 밭에 김을 매라고 했다. 더운 여름에 옥수수 밭 속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도 잘 통하지 않고 땅에서 후끈한 기운이 올라와 어지러웠다.  옥수수 거친 잎이 목이며 팔뚝이며  얼굴을 스치면 종이에 베인 것처럼 상처가 나고, 땀이 들어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이 되어 몹시 쓰리고 아팠지만 참아야 했다. 


보름 정도 지난 후 그 댁 주인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 땡볕에서 죽어라 열심히 일을 했으니 이제 엄마를 데려 오라 하겠지... 기대가 컸다

그 사람이 말했다. "일은 잘하는데..... 암만해도 엄마와 같이 사는 건 안 되겠다... 니가 여기서 일 하다가 니 엄마를 두고 도망을 가거나 하면 니 엄마를 내가 떠맡을 수도 없고.." 모진 사람이었다. 열 댓살 먹은 나를 일 잘하는지 본다는 이유로 보름 넘도록 부려먹고는 차비만 몇 푼 쥐어주곤 가라고 했다. 피눈물이 났다. 내가 엄마를 버리려 마음먹었다면 무엇 때문에 이곳 주천까지 찾아 들어와 살 곳을 찾겠느냐며 사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혼자 큰아버지의 구박을 견디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 큰집으로 돌아갔다.  


문 앞에서 엄마를 부르니  엄마는 반가움에 눈을 크게 뜬 채 불편한 몸을 오른 팔로  문 앞으로  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엄마는 안도했었다. 보름이 넘도록 내가 돌아오지 않자 형처럼 엄마를 버려두고 도망친 줄 생각한 모양이었다.  


큰아버지는 내심 내가 돌아온 것을 반겼다. 농사철에 일꾼 한 명이 없으면 당장 아쉬운 노릇이었다. "니가 끼(기어)가 봐야 어디 밥이나 얻어 처먹을 줄 알아?"라며 심한 욕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른 장마인지 굵은 빗줄기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솜틀집 부실한 지붕에서 비가 새기 시작했다. 공장 뒤편에 쌓아놓은 솜을 전부 옮겨야 했다.  물에 젖은 솜은 말리기도 어렵고, 말린다 해도 딱딱하게 굳어 이불솜으로 쓸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짐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는데 큰길에서 물이 밀려왔다. 솜틀집이 위치한 곳은  지대가 낮아  폭우가 내리면 공장은 무릎 높이까지 침수가 되었다.


물이 빠진 뒤 뒷 설거지할 일이 무척 많았다. 솜이 습기를 먹어 썩어가는 퀴퀴한 냄새가 여름 내 없어지지 않았다.  장마가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 오자 솜틀집이 바빠졌다. 농촌 아낙네들은 추석 때 자식들이 집에 오면  포근한 이불을 내주고 싶어 솜을 틀고 호청에 풀을 먹여 새 이불을 만들었다. 아침 문 여는 시간도 빨라지고, 밤늦도록 솜을 틀었다. 일이 끝나면 빗자루로 몸에 붙은 솜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또래 아이들은 모두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피했다. 옷을 갈아입었어도 내 몸 어딘가에는  솜먼지가 있어 다른 사람들 옷에 솜먼지가 묻어났고, 냄새가 난다고 했다.


한 달 후에는 이사를 해야 했다. 주인집 아들이 군대에서 돌아온다고 했다. 당초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임시로 들어왔던 것이어서 도리가 없었다. 일요일이면 엄마를 수레에 태워 교회에 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음금대에서 양금대를 가자면 제법 먼 거리였다. 수레에 엄마를 태우고 교회를 갈 때면 어른들이 나에게 효자라면 칭찬을 했다. 지금의 거처와 일자리를 도와준 전도사가 고마웠다. 교회 어른들도 반찬거리를 챙겨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나면 교회에 가서 청소하는 일이며 , 소소한 일들을 도왔다. 


엄마는 늘 형을 걱정하고 기다렸다. 우리가 큰집에 살고 있을 것으로 알고 있을 형이  혹시 큰집 쪽으로 편지라도 했는지 궁금해하며, 엄마는 내가 큰집에 다녀왔으면 했만 나는 그럴 맘이 없었다. 나는 형이 야속했다. 어린 내가 엄마와 같이 고생하는 줄 뻔히 알면서 해가 바뀌어도 소식이 없었다. 작년 추석 때 형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형이 "돌아오는 음력설 때 내가 너랑 엄마 데리고 갈게"라고 했지만 정작 설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설이 다가오자 형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그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밤늦도록 기다리다, 소가 여물통을 뿔로 들이받는 소리를 발자국 소리로 속아 내다보고 또 내다보고, 소가 내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혹시나 형이 오는 소리가 아닌가 싶어 애가 탔었다.


그 일 후에는 형에게 아무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큰집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나더러 다녀오라 하니 화가 났다.    

"형이 그렇게 좋으면 형하고 살지 왜 나하고 살아!" 엄마 가슴에 못질을 했다.  그나저나 방을 구해야 하는데 모아둔 돈이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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