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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06. 2020

솜틀집

아들이 주는 밥

큰 집에 사는 6년 동안 원주시내에 가 볼 기회가 2번 있었지만 혼자 시내에 가본 적은  없어 겁이 났다. 전도사에게 들은 대로 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맞은편에 내려  조금 걸어가니 솜틀집이 있었다. 사장님은  대머리였는데, 인상이 좋았고 이북 사투리를 썼다.  배달을 하려면 지리를 익히고 자전거 배우는 일이 먼저였다. 공터로 짐자전거를 끌고 가 3일을  연습하니 익숙해졌다.

출근하면 먼저 판자 만들어진 여러 장의 문짝을  떼어 가게 문을 연 뒤 바로 일을 시작했다. 솜틀집은 먼지의 세상이었다. 눈이 내리듯 공장 전체가 솜 먼지에 덮여있었다. 기계에서는 끊임없이 솜과 먼지가 나왔다. 공장과 붙어있는 사장님의  살림집에도 늘 먼지가 쌓여있었다. 공장 뒤 공간에는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솜들이 보자기에 싸여 천장까지 가득 쟁여져 있었다. 집에서 쓰던 이불솜을 손님들이 맡기면 적당한 크기로 찢어 솜틀 기계에 넣었고, 날카로운 톱니가 순식간에 솜을 잘게 찢어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았다. 기계에서 틀어진 솜은, 구름처럼 뭉게뭉게 벨트를 타고 종일 나왔다. 나는 기계에 붙어 벨트를 타고 나오는 솜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눌러 다진 후 착착 접어 공장 한편에 쌓아야 했다.  일이 끝나면 세수도 힘들 정도로 지쳤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끼니를 챙기고 누우면 치쳤지만 행복감이 돌았다.  큰아버지 집에서 살 때에도 농사일로 골병이 들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진 욕설이었다. 그런데 이제 평화롭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엄마도 "밥 한 술 못 얻어 처먹을 거라 하더니, 아들한테 이리 잘 얻어먹네"하면서 흐뭇해했다.       

시실 날마다 먹을 것이라곤 밥과 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였다. 큰집에서 살 때는 그래도 산나물 반찬 몇 가지며 국도 계절에 따라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틀집에 출근하고 며칠 후 사장님께 사정해서 돈을 좀 빌렸다. 플라스틱 밥그릇과 접시 몇 개, 소금이랑 간장 등 당장 급한 것들을 좀 챙겼었다.

큰집에서 농사를 도울 때, 품앗이로 사람들을 불러 김을 멜 때면 사람들이 나더러 장정 두 사람 몫은 한다고 칭찬하곤 했다. 솜틀집 일이 고되긴 해도 농사를 해 본 덕에 견딜만했다.  

첫 번째 봉급을 받은 날 버스터미널 앞 노점에서 꽈배기를 샀다. 설탕이 눈처럼 덮  꽈배기를 사 들고 버스에서 내려 서둘러 집에 갔다. 집주인 노부부에게 조금 나누어주고 엄마와 꽈배기를 먹었다. 달디 단 꽈배기에 침이 고이고, 한 입 베어 무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형은 큰집에서 우리와 같이 지내다 가출한 지 2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서울 어디에서 공돌이 생활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큰아버지는 나와 엄마보다 형을 먼저 공격했었다. 농사일에 꾀를 부린다는 이유였다. 큰아버지의 괴롭힘이 이어지자 형은 인동꽃이며 약초를 따 말린 후 팔아 차비를 챙겨 가출한 후 여직 소식이 없었다. 가출하던 날 형은 "내가 서울 가서 자리 잡으면 엄마랑 너 데리고 갈 테니 힘들어도 참고 있어라"라고 했었다. 형은 나 보다 다섯 살 위였다. 


엄마는 날 어쩔 수 없어 낳았다 했다. 출생신고도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야 남을 시켜 대충 하는 통에 호적상 이름이 터무니없었다.  집안에서 쓰는 돌림자도 없었고, 성만 같았다.  학교에 다니는 4년 동안 노트를 과목별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노트 한 권에 이 과목 저 과목 필기를 하고 다 쓰면 한 권 사주는 식이었다.  형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형이 말썽을 일으켜도 늘 감싸고돌았다.  반면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도망칠 수 없게 옷을 모두 벗기고 빗자루로 호되게 때렸었다.    한 번은 형이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형이 중학교를 다니다 공부하기 싫어진 모양이었다. 엄마는 상심이 컸고, 이리저리 형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얼마 후 동네 사람 한 분이 제천 중국집에서 형을 봤다고 하자 번개같이 그 날 제천으로 가서 다음 날 형을 데리고 왔다. 그때에도 엄마는 형에게 매질은커녕 싫은 소리 한 번 없었다.  


장마가 시작되자 솜틀집 일이 줄어 한가했다. 큰집에 있을 때 소 두 마리 여물을 챙기는 것은 내 일이었다. 풀이 없는 겨울에는 옥수숫대나 짚으로 여물을 쒀 소에게 먹였다.  여물을 끓일 때는 콩과 쌀겨를 한 바가지 씩 넣어 영양을 보충해 줬다. 여름이 되면 산에 올라 칡넝쿨이며, 갈대, 바랭이 같은 풀을 매일 베 몇 짐씩 지게로 날라야 했다.

여름 비 오는 날 꼴 베러 산에 가는 일이 제일 싫었다. 비 맞기 싫어 게으름을 피우면 소들이 여물통을 툭, 툭 들이받으며 저음으로 메~~ 하며 울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었다. 뽀송한 집안에 있다 지게를 지고 밖으로 나설 때 옷이 젖어드는 그때가 정말 싫었다. 솜틀집에서 비 오는 거리를 넋 놓고 보다 꼴 베러 산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감이 들었다.

큰아버지는 내가 책 읽는 것을 싫어했다. "소 궁둥이나 두드리면서 농사나 지을 놈"이 책을 읽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짓이라고 했다. "니가 이제 책 읽어서 성공할 거야?" 내가 책 읽는 것을 볼 때면 큰아버지는 늘 그렇게 타박을 했다. 큰집에는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적은 책 한 권 외에는 읽을거리가 없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어깨동무"같은 어린이 잡지나, "새마을"같이 정부에서 나눠주는 책, 또는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같이 억지로 사서 읽지 않고 쌓아놓은 책들을 전부 빌려 읽었다. 작년 여름 비 오는 날, 비에 젖어 소 먹일 풀을 베어온 후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엎드려  "홍당무"를 읽었다. 한 동네 사는 친구에게서 빌려온 책이었다. 그날도 큰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둑한 저녁에 돌아왔다. 마루에 걸터앉은 큰아버지는 또 그 소릴 했다. "니가 이제 책 읽어서 성공할 거야?" 평생 소 궁둥이나 두드리며 살 놈이!" 난 못 들은 척 아무 대꾸도 없이 계속 책을 읽었다. 어른이 말을 하는데 계속 그 짓을 한다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책을 빼앗아 찢어 마당에 던졌다. 찢어진 책에 빗물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엄마가 언성을 높여 말했었다. "아주버님, 애가 할 일 다 하고, 빌려온 책 읽는데, 책을 사달라 하나, 일을 안 하나 왜  그리 모질게 그런데요?" 큰아버지는 새끼가 분수 없이 굴면 애미가 가르쳐야지 오히려 싸고돈다며 새벽까지 주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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