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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05. 2020

새로운 출발

 이사 하던 날

큰아버지는 그날도 술에 취해 집으로 왔다.  큰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에 취해 가족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엄마가 반신불수가 된 얼마 후 집으로 이사했다. 6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큰아버지가 엄마에게  주정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제수씨를 함부로 대하기에는 남의눈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큰아버지엄마에게 함부로 했다.  엄마와 내가 이리로 올 때  큰아버지가 우리 재산을 처분해서 챙겼다. 큰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의 몇 배나 되는 큰돈이었다. 명목은 엄마의 병 치료와 나를 공부시켜 준다는 것이었으나  헛 말이었다. 히려 내가 세경 한 푼 못 받는 머슴이 되어 짐승 키우기며, 땔감 구하는 일을 고되게 해야 했다.


올 초 누나가 다녀 간 후 엄마는 누나를 도울 생각에 큰아버지에게 돈 이야기를 꺼냈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큰아버지는 엄마에게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갖 욕설과 비난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중에서 제일 가슴에 박히는 소리는 "지 씹으로 낳은 새끼한테 밥 한 술 못 얻어먹고 뒤질 년"이었다. 엄마가 그를 쳐다보자 욕이 이어졌다. "처~다 봐? 눈깔을 빼 !"

같은 일이 여러 달 계속되자 엄마"빌어먹고 살더라도 가자"고 했다.


그 날 큰아버지가 다시 엄마에게 욕설을 시작했다. 큰아버지의 오랜 행패에 길들여진 사촌들은 아무도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저 못 들은 척 자신의 일만 할 뿐이었다. 큰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아 또 그 욕설을 했다 "지 씹으로 낳은 새끼들한테 밥 한 그릇도 못 얻어 처먹고 죽을 년이.."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분명 들었을 것이었다. 종일 엄마가 꺼이꺼이 울었으니 누군가 분명 큰아버지에게 말했을 터였다. 자식을 잃어 가슴을 쥐어뜯는 엄마에게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었다.

마당 가운데 버티고 서서 큰아버지를 노려봤다.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있는 동안 누구도 큰아버지에게 대든 사람은 없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피하는 일에 길이 들어 있었다.

"큰아버지는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내가 말했다.  "사람 일 관 뚜껑 덮어봐야 안다는데, 조카 앞에서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큰아버지가 싸리 빗자루를 들고 달려들어 매타작을 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엄마가 지팡이를 집고 절룩거리며 걸어와 큰아버지를 말리려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져 울었다.  누나 죽었다는 소리 들었을 때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는 그날 밤 다시 빌어먹고 살더라도 여기서 나가자고 했고 나도 그러자 했다.


다음 날부터 큰집에서 하던 일을 일체 마다했다. 봄철이라 비료와 거름을 밭으로 나르는 일이며  밭을 일구고 파종하는 일에 큰 집 온 식구가 매달렸지만 나는 그 집에서 나갈 궁리를 하느라 며칠을 계속 돌아다녔다. 당장 일손 하나가 빠지자 다급했는지 아니면 걱정이 되었는지 사촌 형이 병든 엄마를 데리고 어디 가서 어떻게 살 거냐며 참으라고 했다.   

"정 마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  내가 그리 매를 맞고 엄마가 마당에 쓰러져 울 때도 큰아버지 눈치 보느라 나서지 않았던 사촌 형이었다.  


큰집에서 나오던 날은 좀 쌀랑한 날씨여서 맨손으로 잡은 수레 손잡이가 차가웠다. 손수레에 엄마를 태우고 가진 세간살이를 다 실었어도 공간이 남았다.  사촌 형수가 밥 해먹을 양은솥 하나, 밀가루 한 바가지, 수저 두 벌을 챙겨줘 고마웠다.  아침부터 서둘렀어도 엄마를 손수레에 태운 것은 점심때가 훨씬 지난 뒤였다. 산 중턱에 있는 큰집까지는 길이 좁고 가팔라서  손수레를 쓸 수 없었다. 개울가에 수레를 두고 큰집에서 엄마를 데리고 오는데 진이 빠졌다.  엄마와 내가  큰집에서 나올 때 사촌형수만이 "가서 아프지 말고 잘 살아요"라며 배웅을 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하러 나간 모양이었고, 큰아버지는 방에 있었지만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어머니와 살 곳은 큰아버지네 집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응금대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집에는 노부부만 살고 계셨는데, 아들은 군대에 갔다고 했다. 교회 전도사의 부탁으로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살라며 방 하나를 내 신 덕에 거리 방 신세는 면했다.  금대마을은 양금대와 응금대로 나뉘어 있었다. 치악산을 배경으로 남향에 위치한 마을이 양금 대였고, 북향이 응금대였다. 교회는 양금대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며칠 전 교회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다. 큰집에서 나와 목숨을 부지하자면 머물 곳과 일자리가 필요했다. 다행히 원주 시내에 있는 솜틀집에서 사람을 구해달라고 전도사에게 미리 부탁을 해 놓은 모양이었다.  솜틀집 일이 뭔지도 모른 채 하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엄마는 방을 내 주신 노부부에게 당신이 그동안 겪은 일들을 단숨에 이야기하고는 마지막으로 "두 분은 제발 병들지 말고 사시우"는 말로 이야기를 끝냈다.

큰집에서 나온 날 저녁 사촌형수가 준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였다. 수제비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집주인 할머니가 나눠 준 고추장을 끓는 물에 좀 풀고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었으니 냄새가 날만한 재료는 밀가루뿐이었다. 쌀을 살 수 있을 때까지 냄새나는 수제비로  버텼지만 마음은 편했다. 열여섯 살 아이와 반신불수 엄마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고향에서 살 때, 농한기가 되면  엄마는 찐빵을 만들어 주변 마을을 돌며 팔았고 물건 값으로 계란, 곡식, 말린 약초 따위를 받아오는 경우도 흔했다. 장에 내 가면 쉽게 팔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한 번은  돈 대신 강아지를 받아 와 집에서 길렀다. 엄마 입장에서는 강아지가 잘 자라 개장수에게 팔면 얼마간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 강아지는 나를 잘 따라서 정이 많이 들었고, 여름이 되자 토실하니 살이 올라 예뻤다. 그 강아지의 이름은 "도꾸"였다.  한창 더운 여름 오랜만에 매형이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아끼는 개를 보더니 입맛을 다시더니 "장모~, 저 개  해 먹읍시다."라고 했다.  엄마는 나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알아서 하게"라고 했다.  도꾸가 눈치를 채고 이리저리 도망치자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여름이라 불을 지피지 않으니 피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내가 아궁이 입구를 막고 앉아서 울며 도꾸를 살리려 애를 썼지만, 엄마는 무심히 보기만 했고 매형은 나를 밀치고 도꾸의 목에 줄을 걸어 끌고 갔다. 매형은 울며 따라오는 나를 귀찮아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개는 나무에 매달린 후에도 한 동안 내가 "도꾸야"하면 꼬리를 흔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형이 싫었다. 누나가 죽은 후 매형 생각이 나면  늘 "개새끼!" 소리가 왔다. 


엄마는 왜 매형에게 "알아서 하게"라고 했던 것일까? 도꾸는 내 유일한 친구였다. 엄마는 새벽에 집을 나선 후 밤에야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고, 형은 함백에서 하숙을 하며 중학교를 다녔기에 토요일 늦게 집에 왔다 일요일 저녁에 하숙집으로 갔다. 학교에서 돌아와 같이 놀 친구는 도꾸밖에 없었다. 내가 도꾸를 좋아하는 걸 엄마가 모를 리 없었다. "알아서 하게"라는 엄마의 승낙은 분명 배신이었다.


엄마가 날 위해 뭘 해 줬던 기억이 없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에도 엄마는 형에게 날  맡기고 학교에 오지 않았다. 운동회나 소풍이나 참관수업이나 단 한 번도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가 말 한적은 없지만 내가 불운을 가져온 새끼인 모양이었다. 엄마가 말했었다. "나이 들어 애가 들어서서 남세스러웠어, 지울라고 배를 때려도 보고, 높은 데서 몇 번씩 뛰 내려도 봤는데 안 떨어지더라고.." 내가 태어날 때 엄마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큰아버지도 나를 보고  "애비 잡아먹은 새끼"라고 했었다. 내가 태어난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알아서 하게"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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