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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10. 2020

갑의 계산 법

골프 비용과 지관 비용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면 예산으로 처리할 수 없는 소소한 비용들이 발생했다. 국회나, 상급기관 공무원, 회사에서 운영하는 각종 위원회 외부위원 등 직 간접으로 연결된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런 분들의 경조사, 특히 애사가 있으면 임원이나 기관장 명의로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데, 임원이나 기관장의 입장에서는 상대를 아는 경우도 있지만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회사의 체면도 있고, 애경사를 당한 분들과 계속 함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경조사를 챙겨야 하지만, 임원이나 기관장에게 돈을 내라고 할 수도 없고, 예산 처리도 불가능했다. 이런 경우에 부서 운영비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충당이 가능하겠지만 공공기관에서 부서운영비는 손님 대접할 차나 음료수 같이 소소한 물품을  구입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런 경우에는 할 수 없이 해당 부서에서 알아서 어떻게든 해결을 할 수밖에 없는데, 직원들에게 출장비 일부를 갹출해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은 일상으로 생기기도 했고, 경조사 챙기는 정도는 크게 문제로 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비용을 통상 "공금"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공금"이 할당되기도 했다. 한 번은 주무부서(각 국의  선임 부서로 임원들을 챙긴다.)에서 임원이 상급기관 분들과 골프를 쳤는데 그 비용을 각 부서에 나누어 내라고 했다. 단칼에 거절을 하니, 상대 부서 차장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사님 골프비용까지 부서에 부담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예요?"라고 항의를 하니

"이사님도 상급기관 사람대접하느라 발생한 비용인데, 이사님 개인 돈으로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럼 접대를 말던가, 골프 말고 돈 덜 들어가는 걸 해야지, 비행기 타고 해외라도 가서 골프 치면 아예 거덜 나겠네요."

"그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빡빡하게 굴면 좋을 것 없어요. 누군 이 일을 내켜서 하냐고요?"

"암튼 우리 부서는 임시 조직이라 예산도 없고, 사람도 없고, 솔직히 돈 있어도 그런 일 하고 싶은 맘 눈곱만큼도 없으니 알아서 하세요!"

마음 불편한 일이었지만 거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 번 부담하면 끝이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쌩 해서 돌아간 주무부서에서 우리를 주무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 국장이나 임원이  근무성적을 나쁘게 주면 망하는 일이었고, 예산 통제권을 이용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었다.


얼마 후 새로운 기관장이 부임했다. 각 부서별로 돌아가며 기관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느라 긴장감이 돌았다. 혹시라고 새 기관장에게 잘 못 보이면 조직생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골프비용을 놓고 말다툼을 했던 주무부서에서 우리 부서는 임시 조직이니 따로 업무보고를 할 필요가 없다며, 우리 부서의 주요 업무내용은 주무부서에서  업무보고를 할 때 같이 하겠다고 했다. 찜찜했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얼마 후 기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른 부서는 다 보고를 했는데, 그 부서는 뭐 하는 곳인데 업무보고 조차 없는 거야!" 그야말로 팍 찍힌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보니 부조리한 돈 문제는 단칼에 거절하는 것이 속 편 했다. 조직에서 그런 문제에 단호하게 대응하면 다음부터는 유사한 일이 생겼을 때 열외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찍히지만, 그건 감수해야 했다.


한 번은 어느 높은 분이 지관을 불러 회사의 풍수를 봤으니 비용을 부담하라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본사를 지방으로 이전한 후 이런저런 뒤숭숭한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임직원들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큰 병에 걸린 사람도 여럿이었고,  조직에 대한 안 좋은 기사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관리자들 중에는 풍수에 신경 쓰는 사람이 많았다. 새로 부임하면 책상 방향부터 시작해서 가구의 위치를 전부 바꾸며 남향이니 북향이니 따졌다.  그렇지만 지관을 불러 회사 위치에 대한 풍수를 보고 비용을 내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 지관이 회사 위치는 좋다고 했어?" 물어보니 "산에서 내려오는 기운이 강한데, 정문으로 그 기운이 들어온 다음에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후문을 만들어 사람이 많이 드나들게 해야 한데요."

"암튼 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일 벌이고 돈 달라는 건 인정 못하겠어" 하고 정리했다.

며칠 후 후문 쪽에 공사가 시작되고, 직원들이 짬짬이 쉴만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다행한 일이었고, 그곳을 지날 때면 지관 비용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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