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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13. 2020

목마름

각인된 기억

엄마가 아프시기 전 아직 쌀쌀한 봄 어느 날 내에서 병아리 열댓 마리 사 왔었다. 봄이라 해도 쌀쌀한 때라 며칠간 병아리들은 방에서 지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외양간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외양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소를 기른 적이 없 늘 비어있었다.  처음에 노란색이던 병아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닭으로 커갔다. 토종닭은 보통 검붉은 색인 반면, 우리 닭은 전부 흰색이어서 이내 뉘 집 닭인지 눈에 띄었다. 열 댓마리 병아리 중 몇 마리는 삵이 잡아먹고 열 마리 정도는 큰 닭이 되었다.

 

촌에서 닭을 가두어 기르는 경우는 없었다. 풀어두면 들이 알아서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 먹고, 하루 한 번 정엄마가 옥수수며 보리 같은 낱알을 마당에 뿌려두고 구구~ 부르면 금세 어디선가 쪼르르 나타났다.


닭들이 배 고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 아버지가 열 마리 정도 되는  닭을 사랑방에 가둔 지 벌써 열흘 가까이 되었고, 난 닭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병 치료차 떠난 후 집에서 나 혼자 지낸 지 여러 달이 지난 때였다.


그 날은 문득 닭에게 모이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계실 때에는 닭을 풀어 키우면서 가끔 구~ 구~ 하면서 부르면 닭들이 달려왔고 그때 옥수수를 모이로 주곤 했 생각이 떠올랐다.


방에서 옥수수 한 바가지 수북이 담아 닭들이 갇혀있는 사랑방으로 가지고 갔다.  촌에서 닭을 방에 가두어 두는 법이 없었지만 닭들이 차지하고 살던 외양간은 사방이 열려있어서  닭을 가둬 둘 수 없었다.  모이를 가지고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닭들이 미쳐 날뛰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옥수수를 담은 바가지를 바닥에 놓을 틈 조차 없었다. 모든 닭들이 옥수수 바가지에 뛰어들고, 날아들었다. 닭들은 모두 미쳐있었고, 나는 무서움에 질려 옥수수가 바가지를 놓쳤다.  바가지가 바닥에서 깨어지며 옥수수 알이 사방으로 튀었다.   

닭들이 열흘 가까지 좁은 사랑방에 갇힌 체  물조차 먹지 못했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던 며칠 전 연주 아버지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나에게 역정을 내며 닭들을 가두라 했다. 그 집 밭에 파종한 씨앗을 다 파 먹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닭을 가두지 못하자, 연주 아버지가 저녁에 사랑방에 옥수수를 뿌린 후 닭들을 유인해 가둔 터였다.

  

닭에게 모이를 주려다 끔찍한 경험을 한 후 나는 닭장으로 쓰이고 있던 사랑방에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약한 닭부터 굶어 더니 얼마 후 모두 죽었다. 닭들은 그곳에서 독한 냄새를 내며 썩어갔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과 공포감이 가슴에 낙인처럼 선명히 다.     


교회 창고로 이사 온 후 엄마의 병이 악화되었다. 온돌이 있어 방바닥은 온기가 있었지만 천반이 없어 석가래와 슬레이트 훤히 보이는 창고는 웃풍이 심해 이불을 쓰고 있어도 추웠다. 그 때문인지 엄마 병세가 심해지더니  마침내 걷지도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병세가 심해졌다.


누군가 엄마를 간병해야 했으나 내가 당장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전도사 사모님께 가끔 엄마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고 솜틀집으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퇴근할 땐 늘 마음이 급했다. 혼자 누워있을 엄마 생각에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 페달에서  연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가 부엌 바닥 쪽으로 머리를 두고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우리가 기거하는 곳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이 있고, 부엌 바닥에서 계단 하나를 오른 후 방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엄마의 다리는 방에, 가슴은 계단에, 머리는 부엌 바닥에 그리 거꾸로 박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성한 한쪽  팔만 허우적거렸다. 놀랄 틈도 없이 엄마를 안아 끌어 방으로 들여놓았다.


"목이 하도 말라서... 지나가는 사람이 있나 해서.... 물 좀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또 질러도 아무 대답도 없고...  하도 목이 말라서 부엌에 나가 물 좀 먹으려다가..." 엄마가 미안한지 변명을 하려 들었다.

내 잘못이었다. 방에 물을 떠다 놓았어야 했지만 엄마는 최근 자꾸 옷에다 오줌을 지렸고, 오줌이 나오는지 어떤지 감각이 없다고 했다. 엄마가 옷에 오줌 싸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물을 안 드렸는데,... 죄책감에 눈물이 났다.  몇 시간을 그리 거꾸로 박혀 있었다니....   

목마름은 그리 지독한 고통인 모양이었다. 어릴 적 돈니치의 우리 집 사랑방에 갇혀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던 닭들과 우리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형이 있었으면... 형이 이곳에서 같이 살면서 공장이라도 다니거나 하면, 난 하루 한 끼를 먹더라도 엄마를 챙길 수 있을 것 아닌가? 독한 그리움이 그만큼 독한 미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의 병이 악화되고 나서 엄마를 시내 병원에 모시고 갔었다.  엄가가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면 했으나 노란색 "의료보호 카-드"를 보더니 표정이 싸늘해지며 도립병원이나 가 보라고 했다. 의료보호는 극빈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사회보장제도였지만 실제 의료보호 환자를 챙겨주는 병원은 없었다.

        

원주시 원동 산 중턱에 위치한 원주도립병원은 늘 파리를 날리는 병원이었다. 엄마를 택시로 모시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입원환자는 엄마가 유일했다. 환자가 없었지만 간호사나 의사를 보기는 어려웠다. 엄마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침대 시트가 오줌에 젖고, 지린내가 도 그들은 모른 체 했고, 내가 찾아가 세탁된 시트를 달라고 하면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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