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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Feb 14. 2020

폭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함경도 장진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훈장 선생님이셨다는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남매 중 맏딸이어서 동생들 챙기느라 빨래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신 이야기를 가끔 하셨지만, 그 이야기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집안일을 하던 고생보다,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진했다.


"니 외할아버지가 가끔 나를 불러서 글을 가르쳐 줄 테니 배우라고 했지만 싫다고 했어. 내가 어릴 때 농사꾼을 배필로 정해 놓고 나만 글을 배우라 하니, 여자가 글 좀 안다고 신랑 앞에서 잘난 척할 것 같아서 도리에 안 맞는 것 같드라."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엄마는 한문은 몰라도 들은 풍월이 많아서 천자문이며 명심보감 같은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웠고 뜻풀이도 잘했다.

글자는 몰라도 들었던 기억으로 천자문 음을 외울 때면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집우, 집주"로 시작해서 천자문 맨 끝 "이끼온 이끼재 온호 이끼야" 까지 단숨이 외운 다음에 "내가 그까짓 것 못 외울 줄 알아"하시면서 일종의 자부심에 어깨를 으쓱했다.


"오즉하면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을까? 니 외할아버지도 애들 가르칠 때 학문이 늦는 애들 가르치느라 답답해하는 거 보면 아이구 야이야(얘야) 선생도 할 일이 아니드라" 이런 이야기며, 책 한 권을 다 마치면 학부모가 떡을 해 가지고 와서 서당 학생들과 나누어 먹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삼팔선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에 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는데.. 어떻게 가 볼 수도 없고... 첨에는 슬픈 줄도 몰랐는데... 며칠 지나 산에 약초 캐러 갔다가 니 외할아버지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나서 산에서 혼자 털썩 주저앉아 발버둥 치며 막 엉~엉~ 울었어. 딱 한 번 그렇게 울고 다시는 안 울었지" 엄마는 그리 말했었다.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구수하게 잘해 주셨다. 나는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를 밤마다 졸랐다. 엄마는 학교에 다니신 적은 없지만 한글은 읽고 쓸 줄 알아서 "흥부뎐"이며 "충향뎐"이라고 적힌 예기 책을 여러 권 읽고 형과 나에게 재미있게 풀어서 들여줬다.


"이 동네 들어와서 니들 낳고 언문(한글)을 배웠지.. 공책(노트)이 어디 있나? 짬 날 때 세수대에 모래를 채워서 기역 니은 써 가면서  배웠지, 하늘이 하는 거는 할 수 없지만 사람 일이야 할라구 맘 먹으면 못할게 뭐 있나?" 엄마는 옛날이야기를 끝낼 때  꼭 사람이 할라구 맘먹으면 못할게 뭐 있나"로 마무리를 했다.


엄마는 혼자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힘들거나 무서운 내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아련한 기억이지만  엄청난 눈이 왔던 겨울 한밤중에 엄마가 형과 나를 깨운 후  내 허리춤까지 내린 눈을 헤치고 아랫집 봉춘이네로 갔다. 문 밖에서 "봉춘이 아버지요~", "봉춘이 아버지요~"하고 여러 차례 부른 후 봉춘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뭔 일이래요?" 봉춘이 아버지가 놀라 묻자 엄마는 "총소리가 자꾸 나는데 안 들래요?" 라고 되물었다. 봉춘이 아버지가 귀 기울여 소리를 듣더니 "에에이~ 아니래요~ 눈에 소낭구(소나무) 부러지는 소리래요" 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나무 가지가 땅, 땅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 소리는 정말 커서 총소리처럼 메아리를 울리며 멀리 퍼졌다.

평창에서 공비들이 이승복이라는 아이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진 때였다.


엄마는 봉춘이 아버지에게 미안하다 하고 바로 눈길을 되돌아왔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엄마도 무서웠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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