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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Mar 10. 2020

벙춘 선생님

오랜만에 금대리 아흔아홉골에 있는 엄마에게 갔다.  큰집을 지나 산을 조금 오르면 지바른 곳에 엄마가 잠들어 있었다.  엄마, 나 검정고시 합격했어. 합격증서를 엄마 앞에 놓아두고 자랑스레 말을 건넸다. 허공에 혼잣말을 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어쩐지 꼭 그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할지... 아니, 어쩌면 남자가 작은 것을 하나 겨우 이루고 뿌듯해한다고 핀잔을 줬을 수도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니 애비는 배포가 있어서 동네에서 소를 잡아도 다리 한 짝은 메고 집에 들어와야 성이 풀렸지.. 잗달게 구는 법이 없었어. 난 서너 알캥이 이루어 놓고는 대단한 것처럼 구는 사내들 보면 같잖터라."

엄마, 그래도 나 정말 열심히 한 거야, 혼잣말을 하고 산을 내여와 큰집을 향했다.


엄마와 큰집을 떠난 후 여러 해가 지났지만 큰집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큰아버지는 내가 책을 볼 때면 "가 공부해서 성공할거여?"라며 못마땅하게 여겼었고, 내가 보던 책을 빼앗아 마당에 팽개친 적도 있었다. 그런 큰아버지에게 검정고시 합격증을 보여주며 큰아버지의 그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싶었 면 응어리졌던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큰아버지는 초라하고 꼬질한 노인네가 되어 누워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겨우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큰아버지, 저 중학교 졸업했어요" 하며 대뜸 검정고시 합격증을 내밀었다. 큰아버지가 뭔 말을 할까? 여러 해 동안 이 날을 고대하며 고생을 달게 여겼었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내가 내 민 검정고시 합격증을 한 번 흘끔 쳐다보고는 그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을 챙기고 있는 사촌 형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내가 아파 누워서 고생을 해도 이놈들은 하루 한 번 삐죽 들여다보면 끝이야.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다 줄 줄도 모르고 말이여, 며느리 남만도 못해..."  대충 인사를 하고 그 방을 나왔다. 냄새나는 늙은이에 불과한 큰아버지였고, 엄마와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고통을 큰아버지는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뭔가 억울했고 서운했다. 미안해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것이던 반응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내가 내합격증서가 어떤 의미인지 관심도 없었고 이해하지도 했다.


야학에서 공부하던 때는 고되고 행복한 기간이었다. 솜틀집에서 일을 끝내고 바삐 야학으로 달려가 공부를 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면 며칠 묵은 나물 무침처럼 가라앉았지만 행복했다.


야학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았다. 부분 공장, 양복점, 음식점 같은 직장에 다니며 짬을 내 공부를 하는 처지였지만 천성이 밝은 사람들이었다.  수업에 늦거나 빠진다 해서 선생님들이 혼을 내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끔 수업을 빼먹고 중앙시장에 들어가 떡볶이며 쫄면 같은 것으로 주전부리를 하며 수다를 떨며  껏 웃기도 했다. 업이 끝나면 갈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을 향하다 서로 집 앞까지 바래다주며 정을 나눴다. 


우라기 가장 사랑했던 분은 벙춘 선생님이었다. 벙춘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쳤는데 큰 키에 꺼벙하고 착한 눈매에 등이 구부정한 분이었다. 우리는 그 선생님에게 벙춘 선생님 또는 노인네라고 별명을 붙어줬다. 영어 수업이 시작되면 다들 눈빛이 풀렸다. 어렵고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그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 "야 이 눔 들아~ 눈이 쾡하니 썩은 동태눈을 해 가지고... 또는 야 이시키들아! 병든 병아리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냐! 라며 안타까운 독려를 했다.

벙춘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정치 이야기나 남을 탓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성실"이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도산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선생님의 댁은 태장동을 막 지나 호저 초입에 있었는데, 부모님들이 양계장을 하셨다. 아주 가끔 특별한 날에는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삶은 달걀을 대접했다. 닭들이 처음 알을 낳기 시작할 때  모양이나 크기가 제각각인 말하자면 엉터리 알을 낳았는데 초란이라고 불렀다. 초란은 못생겼지만 맛은 일품이어서 소금을 살짝 찍어 한 입 물면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했다.

  

벙춘 선생님은 늘 우리 곁에 있었고, 야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잠시 반짝이듯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선생님은 한결같았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밤늦도록 공부할 때는 물론 검정고시를 치르는 날이면 시험장 앞에 텐트를 치고 간식거리를 나눠주며 응원을 해 주셨다.


벙춘 선생님은 의경이 되어서 신안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그때에도 종종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사랑하는 질경이들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제나 그렇게 시작을 했다. "사랑하는 질경이들아"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이 밟히고 찢겨도  기어이 살아남는 질경이 같다고 믿었다. 다른 선생님들 중에는 질경이는 밟히지 않아도 더 잘 산다며 벙춘 선생님의 질경이 이론을 마뜩잖게 여기는 분도 있었지만, 난 벙춘선생님이 좋았다.   

작가 군대 가던 날(오른쪽이 벙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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