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한승 Mar 16. 2020

선생님과 친구들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자라서 그런지 내 성격이 원만한 편은 아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일단 삐딱하게 생각하고, 따지고 논쟁을 했다. 그래도 야학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고 감싸 주어서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야학에서 공부하던 때가 군사정권 초반이었는데 밤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되면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하는 말로 뉴스가 시작되어 사람들은 "뚜뚜 전"이라고 했다. 편파방송이 심하다 보니 사람들이 나서서 수신료 납부 거부운동을 했고, 여기에 맞서 군사정권은 수도요금 같은 공과금과 수신료를 같은 고지서에 인쇄해서 부과해서 수신료 거부를 못하게 했다.

야학에서도 그 문제에 대해 학생들 간에 논란이 있었고 나도 뭔가 항의를 하고 싶은 마음에 사고를 쳤다. 한밤중에 시내 한 복판 커다란 벽에 페인트로 불공정 방송에 대한 항의의 낙서를 벌겋게 해 놓 그날 밤 야간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도망을 쳤다. 아무 준비 없이 한 일이라 주머니에 가진 돈이 얼마 없었다. 주일을 경포대에서 보내는 동안 계속 바다에만 들락거리다 보니 청바지에 소금이 허옇게 맺혀 끈적거렸다. 아는 분에게 부탁해 차비를 구한 후 원주행 버스에 올랐을 때 청바지에서 수분이 마르며 소금이 바가지 시트에 뿌려졌다..


다음 날 야학엘 가니 난리가 나 있었다. 친구 응래가 나 대신 경찰에게 잡혀가 호되게  얻어 맞고 겨우 풀려난 모양이었다. 야학 선생님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중학과정 야학에서 미 문화원 방화사건 때문에  선생님들이 군사정권에 잡혀가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벙춘선생님은 정말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 마디 하셨다.

 

"너만 이 야학에서 공부하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책임지려고 혼자 그리 처신을 하냐? 할 말이 없었다. 정권의 못된 행동에 반대를 한다 해도 앞뒤 없이 일을 저질러 친구가 고초를 겪게 한 것은 무책임한 일이었고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응래는 내 평생의 은인이었다. 내 행동으로 그런 고초를 당하고도 나를 원망한 적이 없었고, 그 후 내가 대학에 진학한 후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생활을 할 때에도 늘 내 곁에서 나를 응원했었다. 경찰에 잡혀가 모질게 고초를 당하고서도 나에게는 "야! 이 씨, 너 땜에 내가 경찰서에서 귀싸대기를 얼마나 맞았는지 알아? 그래도 난 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응래는 그 말 밖에는 없었다.

 

그리 여러 일을 겪으면서 공부를 했다. 대학 입시 마지막에는 솜틀집 일을 그만두고 공부에 매달렸다. 얼마간의 돈을 쥐고 있었지만 여섯 달 정도 입시 공부만 했고  다행히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원주지역 야학의 경사였고 모두 뿌듯하게 생각했다. 서울에 올라가야 했으나 숙소며 등록금이며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운 것은 없었다. 돈은 벌면 되고, 숙소는 대학 도서관 책상 아래서 자면 된다고 생각했다. 형에게 연락하니, 일단 형이 살고 있는 단칸방에 다락이 있으니 거기서 견디라 했고, 다행이었다.


원주에서 서울로 떠나는 날 벙춘선생님이 야학으로 나오라 했다. 막걸리 한 잔 사주시려나 싶은 생각으로 선생님께 갔는데 등록금에 보태라며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셨다. 선생님들이 용돈을 모다 이십삼만 원을 마련해 주신 것이었다. 등록금이 육십팔만 원인데 그중에 이십삼만 원은 엄청난 거액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서울로 가는 나나, 용돈을 털어 거액을 마련해 주신 선생님이나 어쩌면 모두 무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도전했다. 야학 선생님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찐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