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체면보다 돈을 택했다. 처음 인연이 닿은 후 20년이 지났지만 돈에 대한 그의 맹렬한 집착은 더욱 지독해진 것 같다.
보름 전 카톡으로 청첩장이 날아들었기에 무심히 보니 바로 그였다. 10년이 넘도록 서로 전화 한 통 없던 사이였는데, 청첩을 한 것도 마뜩찮은 일이었는데, 그 아래에는 돈을 보내라는 계좌번호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소월 시인의 개여울에 나오는 시 구절 마냥 "부디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 문자 메시지가 다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문자 맨 아래에는 계좌번호가 여전히 돈을 노리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정치인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후, 회사와 직원에게 거머리와 같이 달라붙어 끝까지 피를 빨았다. 더욱 밉살스러운 것은 그의 낮 두껍고 천연덕스러운 처신이었다. 저녁에 직원들에게 삥을 뜯거나 술을 얻어먹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 같이 청렴해야 한다며 다정한 편지를 써서 게시판에 붙여놓곤 했고, 직원들을 가장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늘 떠들면서 한 편으로 어린 여직원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다.
나도 처음에 그를 존경했었다. 따듯하고 배려 깊은 말투와 직원들과 소통하려 자주 이용하는 손편지, 직급에 관계없이 존대하는 태도 등 부족함이 없는 처신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비난하는 직원들을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직속 부장의 계속되는 갑질과 비리를 바로잡고 싶어 한 달 정도 비리의 내용을 기록했다. 부장은 비정규직 직원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 재계약 없어 그만 둘 준비나 해"를 입에 달았고, 관용차를 자가용처럼 이용했다. 심지어 자가용을 몰고 와서는 회사 돈으로 기름을 채우고, 고객들에게 나눠줄 홍보 물품을 깡그리 낚아챘다.
그런 내용을 한 달 동안 모두 기록해서 당시 지사장이었던 그에게 보고를 하면서 지사장님이 꼭 해결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렇게 한 후 직원들과 소주를 나누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바보짓을 한 것이었다. "그거 그 부장하고 지사장하고 같이 그러는 거예요. 지사장이 감싸고 눈을 감아주니 부장이 그렇게 난리를 치는거지, 혼자 그러면 살아남았겠어요? 부장하고 지사장 저녁이면 식당 골방에 모여 고스톱 치고, 부장이 매일 돈 잃어주는 거 직원들은 거의 다 눈치채고 있다구요.."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고, 내가 한 달 동안 기록해 지사장에게 전달한 내용은 즉시 부장에게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부장과 지사장이 나에게 거리를 두고 꺼리는 것이 확 티가 났다. 암튼 난 그 사건 직후 그 지점을 떠나야 했고, 그 부장은 회사를 떠났지만 지사장은 살아남아 직원들을 갈아먹었다.
그는 정치권에서 날아와서 그런지 정치인들이 하는 모금행사 흉내를 잘 내서 짭짤하니 재미를 봤는데, 허접한 글을 써 출판기념회를 열어 책을 강매하고, 직원들을 행사에 동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또 술을 하도 얻어먹어서 간이 좋지 않았는데, 그 병이 회사에서 과로를 해서 걸렸다며 산재신청을 하고, 정치권의 줄을 다 동원해서 기어이 산재 승인을 받아내려 했지만 어린 여직원이 용기를 내서 일을 바르게 처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인자하던 말투를 걷어치우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끝없이 퍼부었고, 썩은 정치인을 동원해서 CEO까지 욕을 보였다. 그의 처신은 그렇게 악명이 높았고, 솔직히 10여 년 전에 그가 정년퇴임을 할 때 그가 떠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사실 작년에도 그가 회사에서 일할 때 저지른 비리로 경찰에 불려 다니고 압수수색까지 받았고 잘못을 전부 당시 부하직원들에게 떠넘겨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한 일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 청첩장을 여러 번 보내고 돈 앞에 염치를 던지는 것을 보니 차라리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엿 먹으라는 뜻으로 오천 원을 입금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