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마나카 요코의 「나미비아의 사막」(2024)
[단평]
*브런치에 발행된 모든 글은 해당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상에서 “뇌 과학”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클릭베이트clickbait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단어는 때에 따라 “입문” 혹은 “가이드”, “정복”이니 하는 미심쩍은 단서를 단 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에도 뇌는 인체 중 가장 많은 비밀을 안고 있는 장기임은 분명하니 “뇌 과학”이라는 주제가 늘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지당할 성싶다.
출판 시장에서도 “뇌 과학”은 호응을 얻는 열쇠말이다. 글을 쓰는 현재 2025년 5월 대형도서판매 사이트 베스트셀러 목록 중 뇌 과학이라는 단어를 제목 전면에 부각한 책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뇌 과학이라는 이름을 직접 호명하지 않으면서 뇌 과학의 언어를 차용해 뚜렷한 성공을 거둔 책이 있으니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이 그것이다. 이 책은 사회의 여러 담론을 경유하여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 많은 챕터를 걸쳐 저자는 단 하나의 주장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나를 직시하자!" 혹은 "나를 알자!". 맨슨은 기존의 소위 '자아 탐색' 담론을 향해서는 냉소주의적 시각을 취하면서도 챕터를 진행하며 계속해서 자아 탐구라는 주제로 돌아간다.
실제 학문으로서의 뇌 과학은 수많은 연구 쟁점을 포괄한다. 다만 자기 계발이라는 특징적 분야와 결부된 “뇌 과학”(전자와 구분하기 위해 큰따옴표를 쳐둔다)은 현재도 2016년 마크 맨슨이 던진 “나를 알자”라는 화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물론 자신을 안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 불멸의 과제이다. 굳이 저 희랍 시대의 유명한 격언(“너 자신을 알라”)를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이 과제를 느끼며 살고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 나는 왜 매일 자기 전 영단어 100개를 외우지 못할까. 나는 왜 귀중한 주말을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보는 데 다 썼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뇌 과학”을 찾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머리 뚜껑을 열어 그 안의 장기를 엿보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
이런 현대 시대의 신탁(“너를 알라!”)이 끝없이 메아리치는 지점 위에 한 여성이 있다. 「나미비아의 사막」의 주인공 카나는 인간을 해설하려 동원되는 모든 압력 위에서 “모르겠어.”라고 외친다.
영화는 친구 이치카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뛰어가는 카나의 모습을 길게 담는 것으로 시작한다. 넉넉한 실루엣의 옷차림을 한 채 거리를 걷는 와중 그는 시시때때로 로션을 바르거나 가방을 뒤적이는 둥 몸을 가만 두질 못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걷는 것마저 그저 걷는 것이 아니라 뜀걸음과 느린 걸음을 시시각각 전환해 가며 카나는 약속 장소로 향한다. 그 모습은 부산스럽고 부주의하다. 어쩌면 카나는 단순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면 카나는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것 따위의 머리 아픈 일은 전혀 생각 안 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카나는 숙취에 시달리며 일어난 아침 맨손으로 냉장고에서 생햄을 꺼내 먹는다. 전날 남자친구 혼다가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도록 햄버그 반죽을 조리하여 냉동해두었음에도 말이다. 카나는 햄버그를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간단한 일마저 하지 않는다. 허기만 채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야말로 카나는 차가운 생햄처럼 “날 것의” 사람 같다. 매일 무료하게 누워 핸드폰을 응시하다 일어나면 담배를 물어 피고 밤이 되면 습관처럼 호스트바 거리를 누빈다. 그는 일견 무책임하고 야생인 인간으로만 보인다.
동시에 카나는 영영 이해될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열심히 약속 장소인 카페로 달리던 카나는 이치카를 만나 먼 동창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는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그의 자살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고 전하는 이치카의 앞에서 카나는 전혀 그 이야기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관심이라곤 보이진 않는 기계적인 반응만을 한다. 이때 카메라는 카나의 관심이 진정 향하는 지점으로 직접 이동하는데 그것은 잡담을 떠드는 옆 테이블이다. 그들의 대화 주제라고는 사이비 경제학, 사이비 처세술 강의 같은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친구의 속 깊은 이야기 앞에서 옆 테이블의 “노팬티 샤부샤부 썰”이나 훔쳐 듣는 데 집중하고 있는 심리를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카나는 늦은 밤 혼다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당시 바람 관계였던 하야시와 아이스크림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눈다. 하야시가 먼저 떠나자 그 직후 카나는 마치 역겨운 것을 맛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차창을 열어 구토를 게워낸다. 카나는 호스트바에 입장하여 놓고 호스트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아도, 심지어 자신의 테이블을 떠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은밀하여야 할 하야시와의 밀회를 앞두고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육교 위를 달린다. 카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 걸까.
카메라는 그런 한 사람의 분주한 삶의 양태를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담는 일에 집중한다. 데이비드 흄이 인간(혹은 자아)은 상이한 지각의 묶음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지속적 실체라곤 없는 카나의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면면을 카메라는 빠짐 없이 포착한다. 인물의 생애를 납득 가능한 형태로 엮기 위해 어떤 면모는 숨기고 어떤 면모는 드러내는 일 따위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부지런히, 또 집요히 카나를 쫓는다. 이때 우리가 카나의 면면으로부터 무엇보다 자주 관찰하게 되는 표징은 역시 “부재”이다. 그것은 절대 결여나 결핍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그저 “없다”라는 동사와만 내밀히 결부되는 명사이다.
카나는 격렬한 삶의 스펙터클에 둘러싸인 중에도 표류하거나 방황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방황이라는 사건도 한 사람이 현실에 속하고자 할 때에나 일어날 수 있다. 카나는 분명 순진함과는 다른 어떤 태도로 무장한 채 영영 '지금-여기'에 구속되지 않는다. 긴밀한 육체관계를 끝낸 후에도 카나의 얼굴엔 피로나 열감의 기색이 없다. 하야시가 바람 상대 혹은 파트너 관계를 진지한 연애 관계로 전환하고 싶다고, 그러니 현재 남자친구와 헤어져 달라고 은밀히 속삭일 때에도 카나는 그것을 진실하게 듣고 있다고는 믿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카나는 “응”이라고 대답한다(실제로 카나는 이후 혼다와 헤어지려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혼다와의 이별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쩌면 그때도 카나는 “노팬티 샤부샤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얼핏 보면 파탄으로 향하는 일직선로를 질주하는 듯한 카나는 마치 이 현실과 유리되어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표정을 연신 짓는다. 이 표정은 계속해서 관객을 괴롭게 만들며 그것이야말로 카나라는 인물이 가진 특출한 기능이다.
그럼에도 카나는 환상 속에 살아가는 인물은 아니다. 카나는 심지어 어떤 순간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대로 왜곡하는 일을 능숙히 해내기도 한다. 그 능숙함을 예증하자면, 혼다는 끝내 카나가 하야시와 오래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야시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카나가 증발하듯 혼다의 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혼다는 이별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혼다는 돌아와 줄 것을 애걸하고 끝내 좌절한다. 나는 네가 떠난 뒤에야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울부짖는 혼다 앞에서 카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뱉고 남은 관계마저 끊어낸다.
카나는 그때그때의 환경에 적절히 반응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판별할 능력도 있다. 하야시와 가정을 꾸린 후 카나는 하야시가 간직하던 태아 초음파 사진을 찾아낸 사실을 숨긴다. 부유층인 하야시의 본가 가족 모임 자리에 참석했을 때 카나는 그곳에 능히 녹아든다. 적절한 정도의 어색함과 얌전함의 기미를 어렵지 않게 구사한다. 또 카나는 담배를 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안다. 모임 중 시어머니가 인사를 위해 카나를 찾아왔을 때 카나는 주저 없이 담배를 비벼 끈다.
이 모든 카나의 면모는 시시각각 전환되면서 남김없이 육체를 통해 발현된다. 그와 동시에 카나의 내부에서 어떤 균열이 적층한다. 그것은 카나가 자신의 그 모든 면을 어느 하나 묵살하거나 포기하지 않은 사실로부터 기인한 균열이다. 내가 아는 한, 한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나 다성적인 목소리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는 발언대로 설계되지 않았다.
결국 어느 날, 카나는 돌연 하야시의 앞에 초음파 사진을 들이밀며 누군가에게 임신중절을 종용한 것이냐고 추궁한다. 하야시를 “살인자”라고 비난한다(카나는 “배신”이라거나 “거짓말”이라는 단어는 언급하지 않고 하야시의 비윤리만을 비난한다, 여기서 카나가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몸싸움과 말싸움, 감정싸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난장판이 벌어지고 이것이 최고조에 달할 때 갑작스레 씬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다음 씬에서 카나의 심상 공간으로 당당히 들어선 카메라는 일종의 스튜디오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하염없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카나를 비춘다. 그 환상 속에서 현실 세계의 모든 난장을 유튜브라도 보듯 구경하고 있던 카나는 곧 러닝머신 위를 내려온다. “너무 지쳤어.”라고 읊조린다.
영화가 진행되며 관객은 카나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일은 정말 지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물론 카나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야시와의 큰 갈등을 겪은 후 정신과에서 도움을 구하기 시작한 카나는 의사와의 첫 상담에서 자신의 병명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현대 정신병의 종류는 매우 세분됐으며 병명의 판별은 꾸준한 관찰을 요하는 일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에 맞서 카나는 병명을 아는 일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엇을 ‘안다’는 행위는 그 무엇에 대한 일종의 분류학이 선행될 때 매끄럽게 실행된다. 분명하게 무엇을 “안다”는 행위는 사전에 그 대상을 산술 가능한 경제 단위로 미분할 것을 요한다. 그리하여 카나는 다분히 절실하게 자신의 병명을 구한다(“xx증 환자”라는 경제 단위를 획득하기 위해). 카나가 힘겹게 발을 내디뎌 '나'를 알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병명 진단이라는 왜곡된 목표를 향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카나를 관찰해온 우리는 별자리부터 MBTI까지의 모호한 인간 유형부터 심리척도나 임상검사 같은 비교적 믿음직한 병리학도 카나 앞에서는 번번이 실패할 것임을 안다. 각자가 열성을 다해 서로를 부정하는 카나의 수많은 면모는 하나의 단위 안에 완연히 포섭될 수 없다. 그 이유로 말미암아 카나는 알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카나는 혼자 있을 때면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저 멀리 이국에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는 짐승을 응시한다. 혼다가 출장을 떠났을 때 집을 지켜야 했을 때는 외롭게 선 나무를 그저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는 그곳에게 자신을 비춰보고 있었다. 영혼 아닌 맨살로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 속에서나 겨우 카나는 자신을 봤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결말에 거의 다다라서야 고백하듯 카나에게 이 세상은 그저 영원히 “지쳐”가는 공간이다. “너무 지쳤다”는 고백은 “쉬지 못했다”는 말과 이음동의어이다. 자신의 어떤 면도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카나는 쉬지 않고 그 모두를 몸짓으로, 또 말로 표현해야 한다. 카나가 몰랐던 사실은 세계는 불온하고 위태로운 여러 경계가 겹쳐진 장소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인간의 모든 면면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조화로운 공간이 아니다.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어떤 측면은 포기하고 어떤 측면은 영영 비밀로 부칠 줄 알아야 한다. 카나가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고 “지치”고 만 까닭은 이 일을 할 줄 몰랐던 탓이다.
하야시의 가족 모임 중 한 친척은 자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카나야. 카나코지만.” 어떤 사람은 “카나코”임에도 자신을 “카나”라고 순진하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군가는 평생을 카나로 살아왔음에도 자신이 "카나"라고 믿도록 만드는 단서 하나 없다.
영화의 막바지, 카나는 환상을 헤매던 끝에 중국으로부터 걸려온 엄마의 영상통화를 받는다. 자신의 근원 앞에 선 카나는 “팅부동”, 즉 “모르겠어”라고 대답한다. “팅부동”은 카나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모국어Mother tongue이며 그때 적절한 단 한 가지 대답이다. 그는 자신의 근원을 수용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은 대답을 유보하는 행위가 아니다. 카나가 반복해서 “팅부동”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찾은 하나의 결론이다. 그것을 끝으로 하여 카메라는 드디어 카나의 삶을 추적하기를 그만둔다.
카나 자신조차 모르는 카나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분류학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카나의 삶 전체는 “양극성 장애”, “정신병” 같은 병리 언어로 단번에 설득력 있게 해설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멘헤라”, “지뢰계” 같은 밈적 언어를 대동해 카나의 존재를 일축하려 할 것이다. 도움을 찾아 방문한 정신과에서 상담 중 스스로 고백한 것을 토대로 보아 카나가 겪는 모든 곤란함은 “중국계 일본인 2세”이며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을 고르든 우리는 이중 한 단어를 고르고 나면 그때 “카나를 알겠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나를 그토록 쫓던 카메라가 “팅부동”을 주문처럼 외우는 카나의 앞에 다다른 직후 물러난 사실은 그의 “팅부동”으로 인해 그의 삶이 어떤 귀결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관찰한 카나의 삶은 그저 일관성 없으며 맥락이 결여된 순간들의 모음이었다. 하지만 그 모음 안에 내재하는 모든 파편 각각은 결코 부서짐을 경험해 본 적 없이, 그저 그렇게 타고난, 무언가다. 파편적 삶의 양태는 카나의 병증을 예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해설하려는 내외부의 여러 압력 위에서 "모르겠어"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생생한 증언이된다.
우리는 살아가며 종종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명사로 우리의 삶 전체를 환원시키려는 힘과 마주한다. 더해 “나를 알”고자 하는 욕망 탓에 그런 힘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그런 힘만으로 간단히 축소되지 않는 다성성과 각별함을 품고 있다. 우리의 삶은 늘 과소결정된 파편의 묶음으로 머무를 것이다.「나미비아의 사막」은 깨어지고 흩어진 듯한 단편들도 꿰어보면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결론에 가 닿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알기 위해 너무 골머리를 쓰기보다 가끔은 “모르겠다”라고 도망치고 증발하듯 과거와 결별하며 이 지난한 삶을 살아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