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스 아웃>의 이야기 양상은 예언적이다. 우리는 마르타가 수십 개의 칼끝이 향하는 장식물의 중심 안에 앉았을 때, 그가 이 도넛 형태 사건의 중심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라이언 존슨은 결론을 전면부에 노출시킨 후 그 전말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이것은 감독의 전작 <브릭>과 <루퍼>에도 나타나는 이야기 방식이다). 우리가 이 추리 이야기 앞에 가지는 독자적 관심은 이런 것이다. 사건의 진정한 전말은 무엇인가. 왜 할런은 그 결말을 마주해야만 했는가. 다만 나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할런의 수수께끼는 블랑이 풀어야할 것이다. <나이브스 아웃>이 진정 예언적이라면 내가 궁금한 것은 예언 사후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크리스티적 허구를 재현한다. 감독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크리스티의 소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 애정은 요란하다 할만한 지경이다(우리는 다양한 모티프 속에서 <장례식을 마치고>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영화를 그 허구로 이끌었는가. 크리스티, 아서 코난 도일, 콜린즈. 그들의 작가적 관심은 무엇이었는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 추리 소설의 관심은 언제나 제국의 지배계급이었다. 당시 추리소설의 소재는 그들의 소유물인 거대한 저택과 고상한 의상, “전원생활, 오후의 티타임, 장미, 증기 기관차, 에티켓”¹이었다. 한 가지 더, 추리 소설 작가의 관심을 이끈 것은 그들의 불안이었다. 불안은 지배계급의 특산물이었다. 제국이 팽창함과 동시에 식민지 외국인의 침략 혹은 차티스트 운동을 필두로 한 노동계급의 봉기가 자신의 문화와 관습을 전복할 것이라는 그들의 불안감은 증폭했다. 영화가 크리스티를 호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불안이 미국에 부활했다. 그것도 더욱 저열한 모습을 한 채.
트롬비 일가의 구성원은 미국적(이와 같은 단어를 즐겨 쓰지 않지만 이만한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자수성가 신화를 체현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신화는 허구다. 린다는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큰 금액을 아버지로부터 빌렸다. 조니는 엄청난 수의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지만 정작 딸의 학비도 스스로 부담할 수 없는 신세다. 그들이 주창하는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는 불로소득의 위태로운 반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할런의 고택에 마땅한 인물이 아니다. 한때 저택을 지배하던 상류층의 여유와 기품은 실종됐다. 넷플릭스, 트위터, 인스타그램이 티타임, 장미, 증기 기관차를 대체하고 있다.
저 고상한 저택 속의 소품 중 눈여겨볼 것이 있다면 입을 벌리고 선 동물 동상이다. 그들은 고함친다. 이곳은 트롬비의 땅이다! 외부인은 당장 떠나라. 그들은 공허한 선동을 하고 있다. 트롬비 일가의 불안이 있는 한 그 동상은 이 땅에 남은 망령이다. 그들은 트롬비 제국의 국경을 수호하는 경호원이다.
<나이브스 아웃>이 그린 정물화 중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마르타 가족의 주택이다. 마르타의 집은 고장 난 와이파이, 낡은 현대 자동차, 주방 한 편에서 상해 가는 과일 더미, 액정 깨진 아이폰의 공간이다. 그 주택은 미국 사회 속 불법체류자의 소외됨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 집은 어떤 의미에서든 국경 바깥에 위치해있다. 한 가지, 마르타의 주택은 적어도 저 전원의 고택과는 달리 거짓된 면피를 쓰고 있지는 않다.
크리스티의 탐정 포아로는 <나이브스 아웃> 속에서 브누아 블랑으로 변모하여 등장한다. 다만 빅토리아 시대의 탐정이 지배계급을 위해 부역하였다면 <나이브스 아웃>의 탐정 브누아 블랑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는 사건을 오독하거나 오해하며 도넛의 형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자의로든 아니든 용의자 마르타와 공모한다. 외국인 탐정 포아로가 자신의 제삼자적 위치를 통해 사건 바깥에서 모든 전말을 판명하고 심판하는 법관 역할과 균열을 수습하는 의사 역할을 수행했다면 블랑은 끝내 타협하지 않는 외부인의 신분으로 트롬비 저택을 수사한다(그는 조니가 자신의 이름을 미국 발음으로 ‘블랭크’라고 발음했을 때 그것을 ‘블랑’이라고 정정한다).
결국 그 국경을 침범한 외부인에 의해 모든 전말이 폭로된다. 트롬비 일가의 구성원 모두를 불안에 시달리도록 만든 것은 폭로의 예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지배계급은 제국의 모든 폭력성과 불공정함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했다. 트롬비 일가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할런의 침묵이었다. 그들은 할런이 외도, 파산, 사업실패, 일탈의 모든 비밀을 감춘 채 잠들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할런의 동맥을 향했던 칼날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끝내 유서의 봉투를 개봉한다. 유서는 모두의 앞에서 선포된다. 모든 유산은 마르타에게 돌아갈 것이다. 블랑은 상속의 정당성을 그(he)의 방식이 아니라 마르타 자신의 방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명백히 증언한다.
마르타의 심성 앞에서 랜섬의 고약한 음모 따위는 어떤 힘도 갖추지 못한다. <나이브스 아웃>은 예언한다. 언젠가 이 땅의 부패는 폭로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의 재산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랜섬의 음모는 부수적인 촌극을 만들 뿐 결론을 조금도 훼손하지 못한다.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이 있다. 탐정이 모든 전말을 재구성하고 폭로하는 장면은 추리 소설 혹은 영화의 백미라고 믿어진다. 그것이야말로 추리 소설의 작가가 모든 고심을 쏟는 장면일 것이다. 다만 <나이브스 아웃>에서 나타나는 이 장면은 다소 유아적으로 이루어진다(랜섬이 칼을 빼어 드는 순간 슬로우 모션을 도입하는 것은 정말 일말의 성실함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유치한 촌극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관심은 마르타의 승리이다. 그 앞에서 트롬비 일가의 대항 따위야 장난감 칼을 꽂아 넣는 허무한 행위로 끝난다.
영화는 끝내 할런의 저택 난간에 오른 마르타를 비춘다. 마르타와 트롬비 일가 간의 수직적 위계가 전복된 형태로 이루어진다. <나이브스 아웃>의 사건은 마르타의 승리로 봉쇄된다. 다만 이 승리의 예언이 영 미덥지 않은 것은 여전히 저 저택을 지키고 선 동물 동상과 박제가 아직도 폐기되지 않은 까닭이다. 제국은 철폐된 적 없다. 우리는 저 미국을 가득 매웠던 붉은 폭력과 선동을 목격한 바 있다. 그 광기의 상흔은 아마 오래도록 낫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는 약속의 땅 위에 성정의 왕국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아직도 트럼프의 망령은 백악관을 떠나지 않은 채 부활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1) 이수미. “빅토리아 시대 추리 소설에 나타난 지배적 이데올로기 양상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5. 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