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님의 <포세이돈 어드벤처>
*브런치에 발행된 모든 글은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 어떨까. 1972년은 비디오 게임이 탄생한 해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지만 비디오 게임의 원조를 찾는 일은 망령을 좇는 것이 될 터이므로 여기선 한 가지 사실만을 떠올리는 데 그치도록 하자. 1972년은 최초의 비디오 게임회사 아타리가 설립되고 그들의 역작 퐁(Pong)이 소개된 해였다. 아타리의 창립자 놀란 부슈넬은 조그만 2차원 그래픽을 놀이문화의 새로운 서식지로 택했다. 퐁 게임기는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미국 전역의 술집으로 공급되었다. 퐁의 등장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새 문화산업 지평의 발로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미혹을 마주했다. 퐁 이전의 탁구 게임을 상상해보자. 우선 여러 가지 준비물이 필요할 것이다. 탁구대, 채와 공, 적어도 두 명의 선수……. 내기를 즐기려 한다면 몇 푼의 돈도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되고야 공은 던져질 수 있다. 게임이 시작된다. 공은 탁구대 위에서 선수 서로를 향해 오고가는 동안은 게임의 것이다. 하지만 공이 한 번 튀어 올라 탁구대를 벗어나는 순간 공은 현실의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게임을 지속하기 위해 그 공을 다시 주워오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퐁은 그렇지 않다. 퐁 속의 공은 화면을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스크린 중앙에서 다시 소환되어 튀어 오른다. 전기가 공급되는 한, 탁구의 모든 상황이 이 8비트 그래픽 안에 준비되어 있다. 하다못해 선수가 한 명뿐일 경우에도 퐁은 함께할 익명의 플레이어를 제공한다. 이 스크린 안에서 탁구는 영원히 완성된 상태로 존재한다.
퐁이 발매된 것과 같은 해, 할리우드는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개봉하였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거대한 쓰나미에 의해 전복된 유람선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기 혹은 영웅담을 다룬 영화이다. 이야기는 몇 줄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하다. 호화 유람선 포세이돈 호의 탑승객들은 새해 전야를 축하하기 위해 홀에 모여 파티를 벌인다. 새해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해저지진에 의해 일어난 쓰나미가 포세이돈 호를 삼킨다. 전복된 배 속에서 살아남은 탑승객들은 탈출을 강구한다. 그 중 몇 명은 프랭크 목사를 중심으로 모인다. 프랭크 목사는 그들을 지휘하고 생존을 도모한다. 그는 굳건한 육체와 정신을 뽐내며 장애를 모두 물리치고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중대한 위험에 맞서 목숨을 희생한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포세이돈 호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배를 떠난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 영화는 교과서이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지금까지도 <타워링>(1974)과 함께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시효로 회자된다. 번뜩이는 부분이 많다. 뒤집힌 선박이라는 공간의 특별함을 성실하게 구현한 촬영 세트는 시각적으로 흥미롭다. 작중 프랭크 목사 역을 맡은 진 해크먼의 연기와 거장 존 윌리엄스의 사운드 트랙은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이 훌륭하다.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증기 밸브에 매달린 채 신의 잔혹함을 맹비난하는 진 해크먼의 연기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다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프랭크 목사의 죽음 앞에서 곤혹스럽다. 이 곤혹감은 그의 죽음이 너무도 적절한 순간 일어났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실로 관객은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그의 죽음을 예감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내내 인물의 죽음을 서사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재난의 극복은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야릇한 통찰을 관객에 납득시키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더욱 저열한 것이 있다. 카메라는 누군가의 죽음이 일어나는 직후 목격자의 눈물짓는 혹은 공포에 떠는 면면을 주시한다. 끊임없이 죽음의 충격과 생존자의 불안 사이의 크레이터를 활보한다. 영화는 그것이 어떤 울림을 자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실패는 이 기획에 있다.
영화는 거대한 비극 앞에서 비겁한 우회를 택한다. 영화는 단 한 차례도 재난을 직면하지 않는다. 인물의 죽음은 일종의 서스펜스 혹은 의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허투루 소비된다. 예를 들어, 작중 세 번에 걸쳐 일어나는 선체의 폭발을 기억해보자. 첫 번째 폭발은 수몰을 불러와 파티 홀에서 구조를 기다리려던 일련의 안일한 생존자들을 쓸어버린다. 그들은 프랭크 목사의 지도에 반발했기 때문에 심판받는다. 두 번째 폭발은 위기상황 속에 한 사람을 낙오시키기 위해 발생한다. 무명씨의 죽음은 고작 그 시퀀스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난다. (심지어 카메라는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듯 공포에 떠는 여성 인물들의 육체를 꼼꼼히 감상한다.) 위기 속에서 벗어나면 인물들은 금방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태연하게 행동한다. 포세이돈 호는 프랭크 목사 무리가 생존의 문턱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폭발한다. 이 폭발로 인해 모두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제 프랭크 목사는 영웅으로 죽어야만 한다. 영화가 진행되며 포세이돈 호는 인물들을 감시하고 방해하며 모종의 음모에 따라 작동하는 생명체로 변모한다.
우리는 이때 어떤 기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카메라는 우리의 윤리적 감수성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재난 속에 놓인 인물의 표정을 주목한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과 같은 표정을 짓는 한 당신은 어떤 품위를 지킨 채 이 비극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움직임 앞에서 그 뒤에 숨겨진 어떤 연출자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비극을 실시간으로 각색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재난은 관객과 소급할 수 없이 거리를 벌린다. 우리는 이미 영화가 침몰이라는 재난 자체 혹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음을 알고 있다. 영화는 재앙 앞에서 끝없이 현실 밖으로 탈선한다. 프랭크 목사의 희생, 한 명이 죽으면 여섯이 산다는 식의 논리적인 목숨값 계산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포세이돈 어드벤처> 속 죽음은 로직을 따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불상사가 발생한다. 영화가 인물의 죽음을 소비 가능한 재료로 호출할수록 재앙은 스크린만의 것이 된다. 재난이 비디오 게임이 되고 만다. 더욱 끔찍한 점은 이 비디오 게임은 클리어된 타인의 플레이여서 우리는 참여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물들이 겪은 재난의 진폭이 지워진 곳에 공허한 멜로와 스펙터클이 자리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와 동시에 너무나 안전한 위치(스크린 바깥)를 배정받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재난은 좋은 오락거리일 뿐이다. 퐁의 탁구공이 2차원 그래픽을 벗어날 수 없듯 포세이돈 호를 덮친 쓰나미는 영영 관객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느낀 기만은 이것이다. 영화는 공감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동시에 공감의 실패를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 앞에서 재난의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관음증 환자가 되고 말 것이다.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시효라면 그 장르가 봉착하고 말 한계도 이곳에 명시되어있다.
나는 최근의 사건 한 가지를 호명하고 싶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무력충돌 사태가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부 공식 유튜브 채널은 교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적의 경계병들을 없앴다”는 제목을 가진 짧은 영상을 공개했다. 실제 아르메니아 병사의 사살 장면이 담긴 이 영상은 비디오 게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인트로와 아웃트로, 긴박한 BGM, 중앙에 배치된 크로스헤어 그래픽(이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삽입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상을 본 뒤 몇 개의 전쟁 소재 비디오 게임을 떠올릴 수 있다. 사진, 영화를 거치며 그 형태를 옮겨가던 우리의 관음증적 욕망은 이제 비디오 게임에 기생하고 있다. 수전 손택은 9.11 테러 생존자가 그 공습을 “영화 같다”는 말로 설명한 장면을 목격한 후 오늘날의 생존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재난을 영화처럼 느껴진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쳤음을 고백하였다. 손택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스펙터클이 현실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고민하였다. 나는 그의 고민을 변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비디오게임이 현실을 도치할 위기를 겪고 있다.
다만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비디오 게임으로 환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끝나기 전 몇 분 남짓에 있다. 6명의 생존자들은 사투 끝에 구조의 손길과 마주한다. 이제 그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재난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 그 순간 카메라는 로고 형사의 방황하는 눈빛을 비춘다. 단언컨대 작중의 어느 서스펜스도 이 신보다 강렬하지 않다. 우리는 시체의 공간인 해저와 구원의 공간인 지상 사이를 헤매는 로고 형사의 눈빛을 보며 그의 후일담을 상상할 수 있다. 그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대중과 언론 앞에서 포세이돈 호의 재난을 어떻게 회고할 것인가. 로고 형사는 후일 악몽의 형태로 부활한 재난 속에서 그의 아내 린다와 프랭크 목사의 죽음을 다시 대면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진정한 재앙은 시작될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들의 후일담을 그려보는 동안만큼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